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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

글 / TR / 흔적

* 소재 주의해주세요.

 

 

1

 

 

 

 일어났을 때 미카는 혼자였다.

 지금 막 깨어나 제대로 들지 않은 정신으로 자신이 누운 곳 옆자리를 매만지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 시트만 손에 쥐어졌다.

 지난 꿈을 떠올리며 기억나는 것을 천천히 곱씹은 미카는 한참 생각을 끝낸 뒤에야 방을 나섰다.

 

 미카 몫의 음식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어제 저녁에 먹고 남은 음식이 용기에 담겨져 있었다. 손잡이를 잡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미카는 사용할 식기를 가지고 하나 있는 의자를 끌어 식탁에 앉았다.

 

 화장실 세면대 바로 앞에는 칫솔꽂이가 설치되어 있다. 칫솔이 하나 밖에 없는 칫솔꽂이를 지나쳐 미카는 익숙하게 일회용 칫솔의 포장을 뜯었다.

 

 

 

*

 

 

 

 그는 졸업을 했고 유학을 갔다. 그는 미카는 가본 적 없는 곳에 가서 더 많은 사람과 만나고 이전보다도 어려운 일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쁠거란 것은 미카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미카를 찾아 왔다. 비행시간에만 수십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이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방문에 일일이 놀랐던 것도 예전 일. 그가 귀국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주기가 짧아질수록 미카의 방에는 그의 물건이 늘어갔다. 원래도 그리 짐이 많지 않던 미카였기에 어느 시점부터는 눈길이 닿는 곳에는 미카보다 그의 물건이 먼저 보일 될 정도로 이 공간에는 그의 흔적이 가득 찼다.

 

 

 

2

 

 

 

 미카는 옷장을 열었다. 몇 벌 없는 옷은 수납장 한 칸을 다 채우지 못 한다. 다른 칸에 있는 옷들은 미카의 것이 아니다. 얼마 없는 미카의 물건을 대신하여 미카의 방을 채운 그의 짐들이 더러워지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미카는 서랍을 다시 조심히 닫았다.

 

 따끔한 느낌에 놀라 살펴보면 손바닥에 잡혀있던 물집이 터진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비치된 구급상자에서 거즈와 소독약을 꺼내 터진 부위를 닦아낸다. 한쪽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서툴지만 그래도 익숙하게 밴드를 붙이는 것으로 응급처치는 끝이 난다. 처치 중에 손 이곳저곳에 붙어있는 밴드를 잘못 건드리면 쓰라린 감각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별일은 아니라는 듯, 미카는 다시 구급상자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

 

 

 

 그는 미카의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어딘가를 다치더라도 티를 내지 않는 미카를 대신하여 아픈 곳이 없는지 온 몸을 살펴주었고, 함께 잠들기 시작한 이후로는 미카가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품에 안아 두 팔로 감싸 주었다. 다시 혼자 잠드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귀국했을 때면 미카는 잊지 않고 그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러면 그도 여느 때처럼 미카의 허리를 끌어안아준다. 그 체온에 휩싸이면 미카는 그제서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3

 

 

 저녁까지 개수대에 설거지거리를 쌓아뒀다. 쌓여있는 것을 해치우기 전에 미카는 다시 옷장 안을 열어 적당한 물건을 찾는다. 한참을 뒤적거리다 이제는 하나 있는 셔츠와 아직은 몇장 더 있는 바지를 찾아낸 미카는 그걸 모두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고 이제까지 미뤄놨던 일을 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는 바빴다.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미카를 보러 와주었지만 그래도 굉장히 바빴다. 미카도 그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비록 오래도록 함께 해주지 못 하더라도 미카는 괜찮았다. 그런 그라도 미카가 부르면 잊지 않고 이 곳으로 와준다. 혼자서는 무서워서 잠들지 못 하는 미카를 위해 미카가 잠들 때까지 그 곁에 있어준다. 시간이 많지 않아 눈을 뜰 때까지 함께해줄 수는 없지만. 겨우 잠든 자신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버리는 것도 전부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상냥함에 계속 의존하려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면서도, 미카는 그 손을 놓지 못 했다.

 

 

 

4

 

 

 

 뭉텅이로 모아놓은 옷들에 불이 붙었다. 이미 수북히 재가 쌓여있는 화로 위로 던져진 천이 끝부분부터 비틀려가며 까맣게 변색된다. 옷에 불길이 치솟을 때까지 들고 있었던 손바닥이 열기에 익어 따끔거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스승님. 왔나.”
 “......카게히라.”

 “오늘도 와줘서 고맙데이.”

 

 

 눈 앞에 서 있는 슈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면 슈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런 미카의 등을 끌어안아줬다. 그 팔에 무게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거면 됐다. 지금 눈 앞에 보이고 있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또 다쳤구나.”
 “괜찮다.”
 “괜찮지 않단 게야.”
 “그래두, 이리 하지 않으믄 내는 스승님을 볼 수 없는걸.”

 

 

 아무렇지 않다는 눈으로 실없이 웃는 미카를 보며 긴 한숨을 내셨다. 그 한순간도 아까워서 고개를 들고 눈빛을 보내면 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카에게 입술을 내려준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화끈거림이 입술로 넘어간다. 그 다음은 허리, 손목, 허벅지. 슈의 손끝이 내려앉는 모든 곳이 뜨겁다. 쓰라린 그 감각에 미카는 슈의 품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일어났을 때 미카는 혼자였다.

 자신 옆에 누워있었을 그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화끈거리던 열기도, 안아주던 그 사람도.

 지난 밤에 봤던 것을 천천히 떠올려본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 저녁에 먹고 남은 음식이 용기에 담겨있어 전자렌지에 넣고 데운다.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열기로 익어버린 손바닥 때문에 아파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온 몸에 생긴 크고 작은 열상을 무시하고, 미카는 하나 뿐인 의자를 끌고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5

 

 

 

 슈는 바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날 때면 귀국하여 미카를 만나러 왔다. 그 횟수가 늘어나고 주기가 짧아질수록 미카의 방에는 슈의 물건이 늘어났다. 슈는 따로 미카의 자췻방의 여벌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방문에 익숙해진 슈는 미카에게 알리지 않고 먼저 미카의 방에 도착하여 저녁에 귀가할 미카를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귀국하고 따로 미카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슈는 그대로 미카의 방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나와 택시가 있는 곳까지 걷는다. 탄 택시에 목적지를 말하고 이동한다. 어디에도 이상할 곳이 없는, 여느 때와 같은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 있던 택시를 난데없이 뒤의 차가 들이박기 직전까지도 슈는 예측하지 못 했었다.

 

 미카가 상황을 알게 된 것은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한 뒤였다. 가진 힘을 다 짜내 달리느라 겨우 병실에 다다랐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려 하던 것을, 미카에게 연락을 준 슈의 가족들이 잡아주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 입구부터 병실까지 거의 기다시피 해서야 볼 수 있던 슈는 산소마스크를 낀 채 누워있었다. 즉사는 피했지만 가망이 없다, 아직 숨이 끊기진 않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 자비 없는 진단에 이번에야말로 미카는 자리에 완전히 주저앉았다.

 

 면회 금지 시간이 다 되어도 미카는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 못 했다. 걷지 못 하던 것을 슈의 가족들이 차에 태워 데려다줬다. 걱정이 되니 한동안 다시 자기들 집에 와서 지내겠냐는 친절한 제안을 거절하고 미카는 혼자 지내던 자췻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현관을 열자마자 후회했다.

 

 슈의 가족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제정신일 자신이 없어서였다. 어디를 보나 슈의 흔적이 있는 곳, 그러나 슈 본인은 없는 곳.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 할 것 같아서 미카는 부러 계단 난간을 잡고 떨리는 다리로 그 집이 아닌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간과했었다. 이 넓지 않은 공간에는 슈가 남긴 것이 너무 많다. 귀국하는 횟수가 늘어가며 미카의 방에는 슈의 물건이 늘어갔다. 칫솔 같은 생필품이나 여기서 갈아입기 위해 가져온 옷들.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새로 의자도 들여왔다. 어디를 보던 전부 슈가 있지만 정작 그 주인은 이 곳에 없다. 이전까지는 너무 익숙해서, 생활에 완전히 녹아들어서 조금도 눈치 채지 못 했다. 한번 깨달은 것들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어 계속 눈에 밟혔다.

 

 몸도 정신도 지쳤지만 미카는 잠들지 못 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어도 슈가 보였다. 다른 곳보다 더 기억이 깊게 남았던 장소다. 다시 혼자 잠드는 일이 늘어나며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어둠이 무섭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두렵다. 이럴 때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품어주던 체온이 없다. 이것이 전부 두려워서, 미카는 잠에 들지 못 했다.

 

 수면도 음식도 며칠이나 취하지 못 한 미카의 몸은 수척해져 있었다. 원래도 말랐던 몸이지만 더 심각해져, 보다 못 한 슈의 가족들이 한동안 자기 집에 와있으면 안 되겠냐고 다시 한 번 제의를 해올 정도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병문안을 가는 중에도 비틀거려 넘어질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적어도 병원에는 매일 가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카도 뭔가를 먹어둬야겠다 싶어 오랜만에 가스 불을 켰다. 파랗게 올라오는 불 위에 올릴 것을 찾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다가 미카는 실수로 냉장고 겉면에 붙어있던 메모를 쳐서 떨어트렸다. 팔랑팔랑 떨어지던 종이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가스렌지로 떨어져 타올랐다. 당황하여 불이 붙은 종이를 꺼내려 하면, 손가락에 뜨거운 열이 닿아 화들짝 손을 뗐다. 순식간에 빨갛게 익어버린 손가락을 감싸쥐었던 순간, 기시감에 옆을 돌아보면 겨우겨우 서있던 다리가 다시 풀린다. 그런 미카를 바로 옆에서 슈가 지켜보고 있었다.

 

 

 “스, 스승ㄴ-”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서 있던 슈의 몸이 투명해지다 사라졌다. 타던 메모장도 전소했다. 믿지 못 할 것을 본 미카는 바로 움직이지 못 하고 그 자리에 한참을 더 멍청히 앉아있었다. 핸드폰에 연락이 와 울릴 때 쯤에야 미카는 정신을 차렸다. 먼저 문병을 갔던 슈의 가족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장례를 치룰 홀의 호수가 같이 적혀 있었다.

 

 

 

6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에 불을 붙이자 맛있는 음식이 나타났어요. 그 다음에는 따뜻한 벽난로가, 그 다음에는 가지고 싶던 선물들이. 마지막에는 성냥팔이가 사랑했던 할머니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종이류가 가장 먼저 타올랐다. 하지만 너무 빨리 꺼져 슈의 모습이 나타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사라졌다. 안 입는 옷가지를 태웠을 때 슈와 또다시 마주했다. 하지만 손이 닿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게 슬펐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것 만으로라도 만족하기 위해 계속 땔감을 넣던 중. 어쩌다 이미 불이 붙어있던 천을 실수로 만져 화상을 입었을 때 슈가 만져주는 곳에서 그와 같은 열기가 느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일부러 물집이 올라올 정도로 화상을 입었다. 슈가 미카의 손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이 혼날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손만이 아니라 온 몸에 다시 한 번 열이 닿았다. 쓰라리고 아프더라도 괜찮았다.

 

 남은 옷의 양이 눈에 띄게 줄자 미카는 집에 있는 다른 물건들 중 태울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자기가 쓰던 칫솔을 태워보았을 때 불길이 일어나지 않고 오그라들어 형태를 잃는 것이 전부인 것을 확인하고 플라스틱류를 쓰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나무로 된 가구를 찾았다. 미카는 두 개 있던 식탁 의자 중 자신이 앉던 의자를 분리하여 불에 태웠다.

 

 슈는 불길이 타오르는 동안에만 나타났다. 미카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민 끝에 미카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밤에 불을 피웠다. 낮에는 식사를 하고, 태울 물건을 정리한다. 밤에는 슈를 부른다. 슈가 눈 앞에 있고, 온 몸에서 열이 느껴졌다. 더 이상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미카는 잠들 수 있었다.

 

 슈는 미카에게 할 말이 있어보였다. 분명히 미카도 알고 있는 말이었다. 알고 있지만 미카는 모른 척, 그 품에 안겼다. 슈의 각 부분이 닿는 곳에 전부 열기가 퍼져 온 몸이 타오르는 것 같이 아파왔다. 미카는 눈을 감았다.

 

 

 

7

 

 

 

 ‘할머니의 모습이 사라져가자 소녀는 가지고 있던 모든 성냥을 태웠어요. 그리고 다음 날 소녀는 차가워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미카의 짐은 한정되어 있었다. 원래도 많지 않던 짐이 완전히 바닥났다. 미카가 가진 물건 중에는 더 이상 태울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슈의 물건은 태울 수가 없었다. 슈의 손이 지나간 물건들이다. 이 세상에서 슈의 흔적이 단 하나라도 더 사라지게 둘 수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더 이상 슈를 볼 수도 없다.

 

 고민하고 고민하던 미카의 눈 앞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자신의 두 팔이 보였다. 그 밑으로는 두 다리가 있었다. 그들과 연결된 자신의 몸도 보였다. 눈 앞에 있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던 미카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이러면 스승님을 만날 수 있을까.

 

 

 칼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슈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까지 그 곁에 있고 싶었다. 슈도 그걸 알고 함께 하자고 말해줬다. 그런 슈니까 분명.

 슈라면, 분명.

 

 

 ‘카게히라, 너는 내 것이다.’

 

 

 머릿속을 뒤지다 떠올린 말에 숨이 멎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사고가 완전히 그로 뒤덮였다.

 피부에 닿았던 슈의 손길을 기억한다. 이 몸을 품어준 체온을 기억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유자의 표식을 몇 번이나 남기며 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끝없이 되새겨주던 것을 기억한다.

 집 안에 남아있는 물건들 뿐 만이 아니다. 슈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 슈의 소유. 상처입히거나 사라져서는 안 되는 존재. 남겨두어야만 하는 것. 슈가 소중히 하던 것. 사랑하고 있는 것.

 

 

 ‘또, 다쳤구나.’

 

 

 슈가 미카의 상처를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괜찮다며 웃던 미카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던 슈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보였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알고 있다. 미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내 것에 상처입히는 것을 용서하지 않아.’

 

 

 카게히라 미카는 슈를 기억하고 있다.

 바로 곁에 그가 없더라도 슈가 했던 말, 했을 말 전부를 알고 있다. 표면 뿐만 아니라 그 안쪽까지 눈치채지 못 했을 뿐 빠짐없이 슈로 채워져 있었다.

 혼자 남았다고 생각했다. 곁에 그 사람이 없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사실 자신은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단 한 순간도 혼자가 아니었는데.

 너무 당연해서 놓쳤던 사실이 당황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웃음과 동시에 눈물이 나왔다. 흐르는 눈물의 양은 점점 더 많아져 어느새 웃음소리를 덮었다.

 

 스스로 살아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슈가 죽은 건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어도 자신도 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런데도 슈의 가족 중 그 누구도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카의 상태를 걱정하며 도와주려고까지 했다. 그 친절함이 죄책감으로 변해 몇 배로 불어서는 미카를 덮쳤다.

 슈가 죽을 때 미카도 죽으려고 했다. 딱 슈가 아직 살아있는 순간까지만 남으려고 했다. 그러나 슈가 죽었을 때, 미카는 슈를 봐버렸다. 슈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설령 거짓이라 해도── 아직 살아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읽은 동화가 떠올라 우연히 보게 된 환각을 억지로 그 틀에 맞추고 이러면 된다고 믿었던 것 뿐. 온 몸에 옅게 화상이 생긴 것도 화로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피부가 벗겨지던 것을 적당히 끼워 맞췄을 뿐이다.

 슈는 처음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미카의 머릿속에 있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미카는 깨어있는 채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꿈이 끝났다.

 

 

 더 이상은 모른 척 할 수 없다. 슈는 자신의 것을 훼손하는 걸 용서하지 않는다. 미카가 해온 일도 분명 용서치 않을 것이다. 미카가 만들어낸 환각들은 모두 미카에게 할 말이 있어보였다. 미카는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슈가 가지고 있던 것은 단 하나도 잃을 수 없다.

 자신은 슈의 것.

 슈가 사랑하고 항상 곁에 두며 소중히 하던 것.

 사랑받는다는 자각이 있었다. 확신도 있었다. 자신이 다칠 때마다 크게 혼내며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라며 으름장을 놓던 모습도 눈에 훤히 그려진다.

 알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방금 흐른 눈물 자국을 닦지도 못 한 채, 새로 나온 눈물이 뺨을 덮었다.

 

 

 

8

 

 

 

 밤이 되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태우지 않았다.

 화상 물집으로 가득한 손은 제대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붕대로 꼼꼼히 묶였다.

 침대에 누운 미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카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에 들었다.

 

 

 더 이상 꿈은 꾸지 않았다.

 


 

 

 

 많은 존잘님들이 참여하신 합작인데 그 안에 이런 부족한 글들이 들어있어도 되는 걸까요..;; 

 처음 쓴 글은 무제입니다. 제목이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무제로 놔뒀습니다. 아무리 읽어봐도 커플연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아쉽네요... 그래도 열심히 슈미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말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을 더 하지 않겠습니다. 자유롭게 생각해주세요.

 흔적은 이미 하나 제출 한 것이 있으니 하나 더 쓴다면 분량이 미달이어도 괜찮다고 주최님께 허락을 얻고 쓴거였는데 본의아니게 폭주하는 바람에 양이 본래 예상보다 훨씬 늘어버렸네요....

 돌발적으로 생각났던 초안은 결국 전부 다 태워버리는 엔딩이었는데, 생각하다보니 슈와 관련된 것을 상처입히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미카이기 때문에 저 엔딩이 더 어울릴 거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초안 같은 엔딩으로 갔다면 글 분위기가 꽤 달랐을 것 같네요. 여기서는 깔끔하게 뺄 건 다 빼버리다보니 초반부터 굉장히 수상쩍은 느낌의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부족한 글들을 받아주신 주최 에리님, 그리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