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AU로, 원작과 설정이 다르다는 점 숙지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츠키 슈, 25세. 그리고 동화 작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상 탓인지 직업이 무어냐는 말에 작가라고, 동화 작가라고 답하면 다들 놀라곤 했다. 그의 작업물들을 보고는 더 놀라워했다. 동화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 그의 글은 동화와는 거리가 멀다.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내용이 난해하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해하지는 못하겠더라도 무언가 엄청난 글이라는 것만은 알겠다는 평이 자자하다. 이해가 되지 않아 짜증이 나기보다는 그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고 하더라. 여하튼 직접 읽어보지 않는다면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슈의 데뷔작이 처음 출판되던 날, 우연히 그의 책을 구매한 유명 블로거가 작성한 리뷰를 시작으로 그의 동화는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그 덕분에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SNS 용으로, 표지가 예뻐서 장식용으로, 기념용, 선물용으로.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것처럼 모든 책이 입고 와 동시에 품절되었다. 데뷔작이 곧장 월간 베스트셀러에 올라 버리면서 이츠키 슈는 어떠한 역경도 없이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계속되는 승승장구를 저주이자 기만으로 여기고 있었다. 평범한 어린아이들이 즐겨 읽을만한 글이 아니라는 것쯤은 작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동화들은 구석구석 수려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섬세하고 아름답기에 이해하기 어렵고 잘 못 건드리기라도 했다간 깨질 듯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자신의 책을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어린아이들은 아닐 테고, 혹 수많은 속물들 속에서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 깨우친 누군가가 구입한 거라 쳐도 그만한 양이 다 팔릴 리는 없다. 처음에는 틀림없이 악질적인 누군가가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넷에서 유행 중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어안이 벙벙해져 혀를 차는 것도 깜빡 잊었었다.
SNS 용으로 책을 산다고? 웃기지도 않았다. 이래서는 의미가 없는데. 아이들을 위한 책이거늘 아이들이 읽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슈는 요즘 고민이 많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 쓰는 일을 즐겼다. 그 솜씨 또한 매우 탁월했으며 예술가들은 모두 그의 글을 찬미했다. 그러나 그가 칭하는 '속물' 중에는 그의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을 직접 고를 수 있다면 더러운 어른보다 맑고 깨끗한 아이들이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 아이, 그 아이를 위해서도.
아, 그러고 보니 처음은 그 아이를 위해서였나. 그 아이를 위해서 이츠키 슈는 동화 작가가 되기로 했다.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말갛게 고운, 산골마을 그 아이. 기초적인 한자도 다 익히지 못했을 어린 나이에 눈을 감아 소설책 한 번 읽어보지 못했을 그 애….
*
올해로 스물다섯이 된 도련님은 겨우 열 살에 실연을 겪었다. 사랑했던 것은 이상하리 만치 적막했던 시골마을에서도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집에 살던 소년. 온 가족이 도시를 떠나 별장으로 이사를 갔었던 때였다.
'당분간은 시골로 내려가 느긋하게 지내보는 것이 어떻겠니?' 유난히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슈를 위해서. 취지는 분명 자신을 위한 것이었지만 슈는 영 탐탁지 않았다. 말만 그를 위해 서지, 사실은 아버지의 사업에 문제가 생겨 유배 가듯 산골짜기로 내려왔다는 것 정도는 열 살 난 도련님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속지 않을 같잖은 핑계였지만 시늉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사용인들이 이삿짐을 다 풀기도 전에 부모에게 등을 떠밀려 찾아간 곳은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외딴 집이었다. 그곳에는 마을의 유일한 또래 남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노부부가 버려진 아이를 주워다 키우고 있다고 했던가. 그런 사정이야 어찌 됐던 애당초 슈에게 친구 같은 것은 필요 없었고 수도로 돌아갈 때까지 책이나 읽어둘 계획이었으므로 얼굴도 모르는 그 애는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 집에 찾아간 것도 인사만 대충 하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작정을 하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자마자 불쑥 튀어나온 얼굴이 생각보다 취향이었나 보다. 빈손으로 방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교육받았기에 가져온 꽃다발을 받고 그 애는 난생처음 받아보는 거라며 화사하게 웃었다. 나이는 몇 살이냐, 어디서 내려온 거냐, 그 아이는 처음으로 만나는 또래 아이에 잔뜩 들떠 질문을 퍼붓다시피 했고 슈는 왠지 조금 부끄러워서 옷소매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아이는 5분 정도 혼자 실컷 떠들다가 그제서야 가만히 서있지 말고 들어오라며 슈의 팔을 잡아끌었고 이츠키 도련님은 정말 막무가내구나,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얼굴은 타오르듯 붉었다.
이름은 카게히라 미카. 어렴 풋이 들었던 이름이다. 한자가 무엇인지 어떻게 쓰는 건지는 모른다. 왜냐면 그 아이조차 몰랐으니까. 자기 이름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아이였다. 만약 십 년만 더 늦게 만났다면 천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언젠가는 그에게 반했을 테지만.
자연은 관상용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해왔던 슈의 가치관을 조각조각 싸구려 빵 칼로 썰어 맛있게 먹어버린 그 아이. 금속 장신구나 부드러운 비단 드레스 같은 것과는 달랐다. 카게히라는 누구보다도 수수하고 아름다웠다. 화려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억지로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가 화사하게 빛났다. 그 애가 걸음을 옮기면, 이 세상의 모든 반짝임도 한 보 한 보 뒤따르듯이. 직접 만나보지 못한 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슈는 아직까지도 그 애의 손에 이끌려 함께 시냇가에 놀러 갔을 때를 잊지 못한다. 그날따라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슈는 그것들을 정성스레 엮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카게히라가 한 아름 꽃다발을 품에 안고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슈는 모자를 눌러쓰고 바람결에 그 애의 옷자락이 팔락이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주변은 온통 푸르러서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보라색 눈동자가 카게히라의 뒤통수를 쫓으면 어느새 그보다도 이질적인 두 색깔이 보라색과 맞닿아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눈 맞추다가도 쑥스러웠는지 갑자기 홱, 휘어지게 웃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 애는, 카게히라는 양쪽 눈의 색이 달랐다. 왼쪽은 호박, 오른쪽은 라피스 라줄리.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네 눈은 꼭 보석 같다고 말하면 그제서야 꺄르르 웃으며 좋아했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눈을 꼭 빼닮은 보석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한참을 혼자 뛰놀다 지친 카게히라가 꽃밭에 누우면 햇빛이 반짝하고 그의 두 눈 위로 내리 쬐였고, 슈는 그 모습을 마음속에 가득 담았다. '조부님이 아끼는 다이아몬드도 저렇게 빛나지는 않던데. 저건 무슨 보석일까?' 그늘에 앉아 실 없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그 아이는 정말, 살아있는 것의 극상의 미. 미사여구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완전하지 않아 완벽했다. 제 눈으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워서 수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밤마다 눈을 감으면 그 아이의 형체가 선명해졌다가 이내 다시 뭉그러진다. 슈는 그것을 써 내려갈 뿐이다. 그 애와 함께 지낸 봄이, 그 짧았던 만남이 아무리 쏟아내도 개운해지지 않을 정도로 솟아오르는 창작욕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이츠키 일가가 도시로 돌아갈 때쯤 카게히라는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열병이라고 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카게히라에게 어른들은 다섯 밤만 자고 일어나면 낫는다고 한 듯했지만 당연히 거짓말이다. 마을에는 이렇다 할 의료시설이 없었고 병은 제대로 된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 걸까? 목숨이 위태로운 건 아닐까? 슈는 두려웠다. 그러나 곧바로 병문안을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나 해사하던 아이가 시름시름 앓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병문안 선물로 삼고자 했던 장미 꽃다발은 방구석에 처박힌 채 시들어버렸고 결국 새로운 꽃다발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로 돌아가는 날 아침, 한창 푸릇한 꽃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오늘은 슈의 부모가 동행한다. 여러 의미로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니 아픈 아이에게는 어렵더라도 노부부에게는 감사의 말이라도 전하려는 모양이다. 맨눈으로 다 죽어가는 아이를 목격하게 될 막내아들이 걱정되기도 했겠지만. 워낙에 고집이 세서 가지 말라고 뜯어말려도 말을 듣지 않으니 직접 동행하는 것이 최선책이리라.
이츠키 부부가 동반하기 때문에 오늘은 자가용을 타고 가기로 했다. 제 부모보다 일찍 외출 준비를 마친 슈는 홀로 새까만 차 안으로 순순히 들어가 문을 닫았다. 기사가 없으면 출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급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아서 손가락을 세워 창가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 아들의 마음에 부응이라도 하듯, 곧 부부와 기사가 걸어 나와 차에 오른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기사가 차에 오르자 잠시 후 드르릉-! 큰 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듣는 시동 소리다. 매끈하고 까만 고철덩이가 시골길을 구른다. 평소에는 기꺼이 두 발로 밟아 걷던 길이 차를 타고 지나가니 색다르게 느껴졌다. 안과 밖의 차이라는 건 생각보다 지대해서 스쳐 지나가는 자연경관이 스크린 속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이 길을 지날 때면 너무 오래 걸은 탓인지 카게히라를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기라도 한 건지 항상 볼이 상기된 채였는데 오늘은 숨이 차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갑자기 시동이 꺼지든가 해서 시간이 지체되었으면 할 뿐이었다.
도시로 돌아가게 된다면 평생 둘러싸여 살아야 할 환경들. 그런 환경들이 싫은 것은 아니다. 다만 중요한 건 주변 환경이 아니라 카게히라에게 있었다. 그 애의 무대는 철저하게 이곳이었다. 누구보다 이질적인 생김새를 가졌으면서 무엇보다도 녹아들어 있었다. 물리적인 헤어짐은 어쩔 수 없더라도 통화를 할 수 있었으면, 하다못해 편지라도 받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 우선은 병이 낫는 게 먼저겠지만.' 슈는 보면 볼수록 어쩐지 한숨이 나와 창가에서 눈을 뗐다. 동시에 지잉, 소리를 내며 창문이 닫힌다. 기계음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니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양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성이 이쪽을 보고 추잡스럽게도 웃는다. 멋대로 창을 올린 건 기사의 소행인가 보다. 예의를 차리는 것과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도시에서 이사를 오면서 사용인을 여러 명 교체했었는데, 어디선가 그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굴러들어온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불필요한 타자의 개입을 선호하지 않는 슈는 오늘 처음 보는 기사에게 면박을 주기 위해 눈길을 돌렸다가 옆좌석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조심스레 그것을 주워 먼지를 톡톡 털어내니 정체를 드러낸 것은 뜻밖에도 이곳에 오기 전 직접 만들었던 인형이었다. 고작 열 살짜리가 열심히 바느질을 배워 조막손으로 만들었을 인형.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거늘 이런 곳에서 발견하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학교를 마치고 평소처럼 데리러 온 자가용에 올랐더니 부모도 아닌 사용인에게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을 들었던 날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는 옆좌석에 두고 챙겨나가는 것도 잊었나 보다. 꽤나 마음에 드는 형태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고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슈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카게히라는 인형은 좋아했던가? 알 수 없었다. 카게히라의 방에 동물 형태의 낡은 인형이 몇 개 쌓여있다는 것 밖에는. 그것들을 종종 가지고 놀기도 했지만 다른 종류의 장난감이 아예 없으니 인형을 좋아하는 건지 단순히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연찮게 마침 손에 들린 인형도 동물의 모습이었다. 이 정도 크기면 왜소한 카게히라도 무리 없이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엉성한 데다 먼지까지 쌓인 인형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연락처나 그 집의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나중에 소포든 뭐든 통해서 보내주는 편이 오히려 나을 거라고 현명한 판단을 내린 직후였다. 막힘없이 구르던 바퀴가 멈춰 섰다.
외딴 집에 도착했다. 노부부와 카게히라의. 슈는 문을 열어주겠다고 나서는 기사를 내치고 직접 문을 열어 자가용에서 내렸다. 한 손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손에는 아이들 손에 꼭 맞는 크기의 곰인형이 들린 채였다. 후자의 경우는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무의식의 이끌림에 의해 집어 든 것이었다. 내릴 때 가지고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이끌어낸 결과인지는 몰라도 슈는 손에 꽃다발 이외의 무언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실내에 들어서고, 그의 부모가 노부부와 데면데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슈는 서둘러 카게히라를 찾았다. 평소에는 활짝 열려있던 방문이 굳게 닫혀있다. 닫힌 문이 어쩐지 차갑게까지 느껴진다. 문 앞까지 올 때 그 답지 않게 조금 뛰었던 것이 무색하게 슈는 카게히라의 방에 쉽게 들어서지 못했다. 문 바로 앞에 서서 잠깐 동안 서성이다가 굳게 마음을 먹고 서야 문고리를 돌릴 수 있었다.
끼익-. 낡은 나무 문은 여닫는 것만으로도 괴상한 소리를 냈다. 겨우겨우 들어선 것이었으나 이츠키 슈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에는 시계 초침 소리, 그리고 카게히라의 가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카게히라는 눈을 감은 채로 배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있었다. 텀을 두지 않고 색색 거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오지만 않는다면 잠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얼굴이 새빨갰다. 딱히 신체에 손을 대지 않아도 열이 오를 대로 올라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부부가 조금이라도 열이 내리기를 기도하며 아이의 이마에 올려두었을 물수건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듯했다.
슈는 카게히라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어쩐지 울컥하여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는 그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데 야속하게도 여덟 살짜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려고 문고리를 쥐자 덜커덕, 쇳덩이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이 낡아빠진 집은 문고리도 말을 안 듣는구나. 혹여 카게히라가 깨어날까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슈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됐다. 사실 깨어나더라도 사물과 사람을 분별할 정신은 있을까 싶었지만 곧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허사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슈 군."
"..."
날아든 음성은 분명 카게히라의 것이었으나 가뭄이 오기라도 한 듯 쩍 갈라져 있었다. 슈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조심스레 돌아선 곳에 겨우 눈을 뜬 카게히라가 있었다.
"우리 소풍가기로 하지 않았나? 소풍날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을 가져갈게."
"카게히라."
슈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벌려 겨우 소리를 냈다. 그러나 마땅히 뒷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함께 소풍을 가기로 했던 약속을 기억한다. 카게히라가 떨리는 표정으로 해 온 제안을 승낙하자마자 기대감에 부풀어 폴짝이던 몸짓이나 해사하게 웃던 얼굴도 기억한다. 카게히라가 앓아눕지만 않았더라면, 작별 인사는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다정한 언덕 위 소풍에서 하기로 예정되어있던 터였다. 새먼베리처럼 붉은 깅엄체크 돗자리를 깔고 적당히 봄볕이 드는 앵두나무 밑에서 샌드위치나 먹으며 하기로 되어있었다. 답을 찾지 못하고 떨리는 자수정 눈동자는 안중에도 없는 듯 슈의 뒷말을 듣지 못했음에도 카게히라는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다. 여전히 가쁜 숨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집에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바구니에 가득 채워서 떨어트리지 않게 보자기를 감싸 가져갈끼다. 그리고 내는, 사탕 같은 거 안먹어도 된다. 그러니까..."
"카게히라. 내 말을 잘 듣거라."
슈는 언제나처럼 어린아이 답지 않은 말투로 카게히라의 말을 끊었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떠올리지 못한 채였다. 스스로도 대책 없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러나 카게히라는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슈 군, 내는 이대로 잊혀지고 싶지 않데이.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내일 눈을 떴는데 슈 군의 모습이 안보이믄 내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데이..."
카게히라는 계속해서 눈가를 비볐다. 이미 다 말라버려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비볐다. 거친 옷소매에 쓸린 눈가가 빨갛게 헐어있었다. 생채기를 눈치챈 슈가 기겁하며 그 행동을 저지하고자 손을 올렸다가 곧 다시 떨어트린다. 저지한다고 한들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 순간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고 달싹이던 입술은 결코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입에 올렸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하지."
"그 다음이 언제가...!"
"만날거야. 서로를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단언했지만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카게히라의 두 눈동자 위로 머리칼과 같은 색의 속눈썹이 드리운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의 움직임은 사뿐하고도 힘겹다. 얇은 솜 이불을 힘 있게 꼭 쥐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손 틈에 슈는 작은 곰인형을 쥐여주었다.
차 안에 있던 인형이다. 어느 틈에 가지고 내렸는지 스스로도 의아했지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선물하기가 무안하고 또 미안했다. 몇 달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던 인형을 세탁도 수선도 하지 못한 채로 주게 되어서. 그렇지만 슈는 초조했고 오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시로 돌아가서 택배를 부치느니 하는 이야기가 어찌나 허무맹랑한지 깨달았기 때문에.
"그 때가 온다면 네가 맞다는 증표로 내게 보여주렴."
슈는 일부러 당연히 만나게 되리라는 듯 말했다. 돌연 말라버린 줄 알았던 카게히라의 눈망울이 젖어든다. 가득 고인 눈물은 그 아름다운 눈동자 빛깔을 잠시 흐리고 깜빡임 한 번에 아래 속눈썹에 맺혔다가 선홍빛으로 상기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슈는 다정하게 카게히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살 차이도 나지 않건만 꼭 어린아이를 돌보는 어른 같은 몸짓이었다.
슈는 조심스레 카게히라를 떼어놓았다. 부드럽고도 다정한 손길에 카게히라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떨리던 손은 더이상 떠나는 이를 붙잡지 않았다. 문에 가까워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문고리를 손에 쥐고 슈는 잠시 뒤돌아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고즈넉하다 못해 낡은 방 안에는 가냘픈 소년, 그와 함께 남겨질 화사한 꽃다발과 조그마한 곰인형. 그 모습을 보고 슈는 문고리를 돌렸다. 따로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조금은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 하고 눈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끼이익, 탁. 문이 닫혔다. 슈는 방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걸음을 삐끗했다.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삐걱대는 마룻바닥을 걸어 현관문까지 빠져나오니 낡은 나무집이 한눈에 담긴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테지. 하지만 그는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다음이란 참으로 속 편한 단어가 아닌가! 다음이라는 말을 대면 구체적인 것은 그냥저냥 적당히 묻어버릴 수 있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드는 건 마음 속 어딘가 매장해버리면 되는 일이다. 굳이 카게히라에게 밝힐 이유는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병세가 심해 보인다는 것쯤은 열 살 난 도련님도 진절머리 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헐떡이는 카게히라가 낯설었다. 낯설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그는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카게히라를 마주하자마자 이번 만남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도 둘러댔다. 오래된 전구의 퓨즈 마냥 금방이라도 뚝 끊어질 듯한 카게히라에게 겨우 꽃 몇 송이와 엉터리 인형 한 개, 평생 지키지 못할 약속만을 안겨주고 나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걸 끝으로 슈는 도시로 돌아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순히 탑승한 차는 심히 덜컹거렸으며 카게히라가 곁에 있었던 보름 전보다 추웠다. 슈는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차가운 차 안에서 눈을 뜨니 어느샌가 저택이었다. 전신이 들어올려지는 듯한 감각에 깨어나서는 휘청거리면서도 스스로 내리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슈를 부모는 꼭 안아주었다. 침실에 데려가 오늘은 일찍 잠드는 것이 좋겠다며 이불을 덮어줬다. 열 살의 도련님은 별다른 저항 없이 네모난 가구 위에 누워있다가, 이따금 몸 어딘가가 뚫린 듯이 아파서 밤새 침대 시트를 긁고 또 때려가며 울다가 지쳐 잠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꼬박 하루가 지나간 다음이었다. 슈는 일어나자마자 물을 마셨다. 그의 베개는 흠뻑 젖어있었다.
그 후로도 카게히라의 절규만이 뇌리에 가득했다. '이대로 잊혀지고 싶지 않아.' 너무나 절박했던 외침이 귓가를 맴돌았다. 지키지 못할 약속에 대한 업보를 갚기 위해 슈는 펜을 들었다. 카게히라를 위해서. 기초적인 한자도 다 익히지 못했을 어린 나이에 눈을 감아 아름다운 소설책 한 권 못 읽어봤을 그 아이를 위하여. 그 애의 이야기를 쓰자. 앵두나무 한 그루 듬직하게 솟은 언덕 위로 소풍을 가는 이야기를 쓰자. 모든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바치자.
*
"슈 형."
"....."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음? 그랬지. 오늘은 꼬맹이 너를 만나러 왔던 참이었지. 오랜만인데 실례를 범했군. 무슨 생각이냐니,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게야..."
슈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고교 후배를 만나러 온 참이었다. 사카사키 나츠메. 잘 익은 사과처럼 붉은 머리칼에 고양이를 닮은 눈매를 한 남자가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신비한 빛을 띄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약간의 호기심이 서려있었다. 그는 이츠키 슈의 몇 안 되는 친우였다.
멀끔하고 감히 입에 올리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유려하고 섬세한 외모를 가진 데다 귀한 집 도련님으로 살아온 그에게 친구가 몇 없는 것은 그가 돈과 외모만을 눈에 담고 접근한 이들에게 곁을 내줄 만큼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만을 추종하는 속물들과는 달리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알아보는 자 많이 그의 친우가 될 수 있었다. 진정 아는 것은 쥐뿔만큼도 없는 주제에 아는 척 뻗대는 불손하고 오만한 자들과는 추후에도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츠메를 비롯한 친우들은 슈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슈 뿐만 아니라 보물인 그들이 전인류에게 소중하게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슈는 멈춰있던 손을 뻗어 찻잔의 손잡이를 쥐었다. 입가에 가져갔으나 따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자기 잔에 담긴 찻물은 이미 식어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 늦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자신의 몫만 미리 시켜둔 것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꽤나 시간이 흐른 듯했다. 지나간 일을 공상하는 일에 빠져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어딘가의 주황머리나 할만한 짓이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으니 나츠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미안할 것 까지야. 그보다 전화 안 받아?"
"아, 중요한 연락은 아니라는 거다."
슈는 익숙한 듯 지잉지잉 울리는 휴대전화로 손을 뻗어 버튼 하나를 꾸욱 눌렀다. 이츠키 슈는 어떠한 기계를 사용할 때 최대한 그 모든 기능을 사용하고자 하는 남자였다. 그 버튼을 길게 누르면, 수신 보류가 된다더라. 전화를 끊었다가는 되려 다음 통화 때 말이 길어질게 뻔하니 진동이 울리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치만 발신인에 편집자라고 써있던데?"
"그래. 보나마나 팬미팅을 해달라고 조를게 뻔하지. 내 작품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한 이들과 만날 필요가 있던가? 시간낭비 수준이 아니라는 거다. 심히 모멸적이고 역겨운 모욕이지."
"그렇지만 슈 형, 이번에는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왜 그래야하지?"
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불쾌함을 딱히 숨기려 하지 않았다. 속물들이 작품을 팔아준다고 기뻐할 이츠키 슈가 아니었다. 오히려 SNS나 보고 유행 따라 책을 사는 저급한 멍청이들의 소비를 제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나츠메 또한 이러한 슈의 생각을 익히 알고 있고 평소라면 굳이 권하지 않았을 텐데. 어딘가 수상하다. 슈는 꼭 진실의 눈이라도 가지고 있는 양 나츠메를 쏘아보았다. 좁혀진 시야 사이로 들어온 인영은 태평한 미소를 띄고 있을 뿐이다.
"글쎄. 다시 한 번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게 무슨..."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거 아니었어?"
좁혀졌던 눈이 이번에는 크게 뜨인다. 다 식은 차라도 들이키려 찻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멈췄다. 반면에 나츠메는 여유롭게 홀짝인다. 순간 답지 않게 놀라버렸지만 슈는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굳이 카게히라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만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그 아이, 만나고 싶은 사람, 카게히라는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군."
"나를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츠메는 여전히 태평했다. 그의 말이 단순히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츠키 슈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나츠메가 슈의 예술적 고집을 인정하는 만큼이나 통감했다. 나츠메는 유난히 감각이 좋았으니까. 여전히 손에 들린 찻잔의 수면 속 얼굴이 일렁였다. 자수정 빛 눈동자가 동요하고 있었다.
"...정말로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 하는게냐?"
"확답은 줄 수 없어.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야."
"그래, 그렇군. 알겠다. 급한 일이... 생겼다는게야.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하지.“
나츠메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로 인사를 받았다. 덜컹, 슈가 몸을 일으켰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한적한 가게를 걸어나가는 모습은 당당해 보였지만 동시에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가게를 빠져나간 슈가 재빨리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통화기록에 고스란히 남은 9회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혀를 찼다. 지독하기도 하지. 이마저도 슈가 역정을 낸 이후로 상당히 횟수가 줄어든 것이다. 그는 혐오감에 부들대는 손가락을 애써 통화 버튼에 가져다 댔다. 그 아부 떠는 목소리를 들을 생각에 벌써부터 부아가 치밀 정도였지만 해야만 했다. 눈을 딱 감고 눌렀다.
*
몇 주 뒤, 나츠메의 조언에 따라 팬미팅을 진행하기로 했다. 편집장에게 먼저 통화를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허겁지겁 전화를 받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전화 한 통 했을 뿐인데 예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 일사천리로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렇게나 완강히 거부했는데도 미리 준비해두었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행하려 했던 모양이다. 이상하고 조잡한 시스템에 좁고 누추한 장소에서 진행하는 어리석고 우매한 속물들과의 팬미팅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나츠메의 말은 거의 틀리지 않으니까. 그렇다. 팬미팅 개최 이유는 '정말 혹시나 해서.' 혹시나 그 애가 올까 봐. 그럴 일은... 매우 희박하겠지만. 살아있더라도 이곳에 올 확률은 낮았다. 하물며 생사가 불확실하다 못해 세상을 떠난 것이 기정사실인 아이가 올 확률은 매우 낮다 못해 거의 없겠지만서도.
팬미팅이 시작하기도 전에 슈는 후회했다. 웅성웅성 소리 한 번에 정신력이 오십쯤 차감되고 있었다. 블로그나 SNS에 올리기 위해 벌써부터 이곳저곳을 찰칵찰칵 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면 잠을 푹 잤는데도 다크서클이 생길 것 같았다. 아니 잠깐, 사람 얼굴에 대고 갑자기 플래시를 터트리는 건 지나치게 몰상식하지 않은가? 큰 소리를 내는 대신 쯧, 혀를 한 번 찼다. 벌써부터 인류에는 바닥을 치고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짊어지게 될 리스크가 너무 큰 것 같은데... 사실 이런 자리 하나쯤 뒤엎은 뒤 박차고 일어서는 것쯤이야 그에게는 일도 아니었지만 속는 셈 치고 있어보기로 했다. 스태프가 다가와 말을 전했다. 곧 팬미팅이 시작한다.
*
'...'
완전히 허탕이었다. 그 애는 커녕 그 애를 닮은 애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왼쪽 눈은 석양지는 호박에 오른쪽 눈은 심해가 잠긴 청금석. 결코 스쳐 지나간다고 한들 놓칠 수 있는 인상은 아니다. 하물며 사인회까지 진행했는데 못 알아봤을 리가 없지. 팬미팅이 끝나 스태프들이 행사장을 정리할 때까지도 제자리에 앉아있었지만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정리를 마친 스태프들이 슈의 눈치를 살살 보며 이제 곧 대관처를 비워줘야 한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행사장을 벗어났다. 허탈함과 정신적 피로에 범벅이 된 상태였다.
이츠키 슈는 거리를 걸었다. 물론 명색이 도련님인데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돌아가지는 않는다. 행사가 끝나기 30분 전에 이미 기사에게 근처로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기사가 도착한 그 곳이 꽤 떨어져 있어 조금 걸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빈말로도 너그럽다고는 할 수 없는 막내 도련님께 혼이 날 것이 염려되었는지 기사는 매우 곤혹스러워하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문자 메시지인데도 생생히 느껴지는 그 절박함을 보고 슈는 짧게 '알겠다'라고 답장했다. 반강제인 점이 아주 언짢지만 어차피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 물론 '괜찮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후라지만 아직은 해가 창창했다. 그의 머리칼은 본래 가장 예쁜 장미꽃을 꺾어다가 정성껏 말렸을 때야 나올 법한 색이었지만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빛깔이 꼭 달콤한 딸기 생크림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찡그린 눈매에 반쯤 감춰진 자줏빛 눈동자는 영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약간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 들어 카게히라에 대한 헛된 기대가 꾸물꾸물 고개를 드는 탓이었다. 그는 카게히라의 마지막을 보지 않고도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단정 지었다. 분명 팬미팅을 시작하기 전에는 '과연 올까?'였다. 설마 하는 마음. 그런데 팬미팅이 진행될수록 그 마음이 '언제 올까?'로 변모해버렸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빌어먹을. 인간의 몸을 입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불쾌하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그 아이의 상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니.
한 쪽 손을 들어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얼굴을 덮었다. 그런 바보 같은 희망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슈는 망설임 없이 걸었다. 그러나 거리는 알게 모르게 소란스러웠다. 웬 미남자가 돌아다니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힐끔 쳐다보고서 지나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으나 슈는 개의치 않았다. 다가오기만 해보라는 듯 사나운 시선에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거나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만족이다. 그리고 세상일이 다 그렇듯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 쭈뼛쭈뼛 다가와 서투르게 말을 걸어댔다.
"그, 작가님 맞제!"
"...누구를 찾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잘 못 봤다는 거다."
"내 작가님 동화책 진짜 좋아한데이. 아르바이트 월급 나오자마자 다섯권이나 샀구..."
"먼저 말을 걸어놓고선 태도가 불량하군. 내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아, 그러고보니 책도 가져왔는데. 싸인 해줄 수 있나? 내는 이 대사, 이 부분을 제일 좋아한다이가?"
"..."
다가온 것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였다. 남자는 가방에서 책까지 꺼내 보이더니 슈의 글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읽을 수 있다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평소였다면 SNS 따위에서 내 작품을 얼핏 봤을 뿐일 속물 녀석이 별 시답잖은 이유로 말을 건다며 불쾌감을 표했을 슈였지만 어째서인지 드물게도 밉살스럽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정신력과 기력을 소진하였으므로 더이상 누군가를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투리를 쓰는 걸 보니 꽤나 멀리서 저를 보러 달려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도 꼭 저런 말투를 썼었던가. 오늘따라 자꾸만 떠오르는 옛 추억을 되새기며 자리를 피하려 하자 남자는 이제는 대놓고 앞길을 막았다.
"이만 실례하지."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 아악?"
그 순간 바람이 거세게도 불었다.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끈이 빠진 남자의 후드는 강풍에 훌러덩 벗겨졌다. 한참이나 가려져 있다 드디어 드러난 얼굴은 놀랍게도 그렇게나 그리던 사람의 것이었다.
"카게히...!"
남자는 꽤나 당황했는지 얼굴은 울상에 헤집어진 머리칼은 산발이었지만 햇빛을 받은 두 눈동자가 선명하고 깨끗하게 반짝였다. 아름다운 안광이었다. 하물며 스치듯 지나갔다 해도 놓칠 리가 없는데 그렇게 가까이서 알아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 눈에 그 광휘, 틀림없이 그 아이였다. 카게히라가 다시 이츠키 슈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떠오른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나 슈는 그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망설였다. 그렇게나 그렸던 대상과의 재회인데도 마음 놓고 즐기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져버리지 못하고 안 하던 짓 해가며 팬미팅이나 열었던 주제에 정말, 정말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러니까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을 진짜로 마주하니 반갑다기보다는 의심스러웠다. 그는 의심했다. 정말로 카게히라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카게히라가 아닐 리가 없다고 호소하고 있었지만 이성이 혼자서 백스텝을 밟았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니 제법 말이 되는 가설이 몇 개 튀어나온다. 하나는 어떠한 경로로 자신의 과거를 알아내 그 아이의 분장을 하고 흉내를 내는 몹쓸 사생팬이라는 가설이었다. 이 경우는 사생팬의 솜씨가 초인적으로 좋다는 가설이 깔려있었다. 웬만해서는 이츠키 슈의 심미안을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하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카게히라가...
'귀신?'
죽었다 귀신이 되어 살아나서 저를 만나러 온 카게히라란 말인가? 그렇다면 더 일찍 찾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모르는 사람 행세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저택 3층 창밖에서 카게히라가 문을 두드렸어도 슈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흔쾌히 창을 열어젖히고 그를 맞았으리. 체온이 없어도 따뜻한 자리를 마련하고 먹지 못해도 진수성찬을 대접했을 것이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이였는데 그런 것에 일일이 놀란단 말인가.
그렇지만 귀신이라는 가설은 전자보다도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왜냐하면 어째서 이제야 찾아왔느냐는 의문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꼭 다시 만나자고 약조했으니 귀신이 되었다면 반드시 가장 먼저 슈를 찾아왔을 텐데. 그 아이의 성정이라면. 차라리 사생팬의 실력이 매우 초인적이라는 가설이 더 현실적이어 보였다. 그렇다면 저 괘씸한 카게히라 흉내범을 유인해서 단죄해야겠다고 이츠키 슈는 마음먹었다. 일반인이 감히 이해하려 들기엔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었지만 아무튼 지금의 만남이 결코 유쾌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이츠키 슈는 뛰기 시작했다.
"와... 와 도망치는데!"
달아나는 미남자를 쫓아 카게히라 흉내범 –추정-이 달렸다. 척 보기에도 바짝 말라있는 몸에 비해 달리기 실력이 제법 좋았다. 그러나 체력은 영 부족한 건지 두 번째 블록부터 숨이 차 보이더니 세 번째 블록 끝에 도달하자마자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헥헥 거리는 모습을 슈는 건너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횡단보도가 있었고, 지금 신호등은 빨간 불이다. 카게히라는 지쳐 풀린 눈으로 구경하듯 자신을 보는 슈를 미주 바라보다가 건너편을 향해 외쳤다.
"만날라구 왔다이가. 신칸센 타구 왔다이가. 이름도 똑같구... 첫 페이지 부터 알았다이가. 말투가, 후... 아 왜 이렇게 뛰고 그러나? 힘들어 죽겠데이. 아무튼 글자 한 자 한 자 완전 슈 군이더만. 그 책 몇 권만 부적처럼 모셔다가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남자는 헉헉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귀가 따갑다는 듯 그의 말을 절반 정도 흘려듣고 있던 슈도 말이 이어지자 고개를 돌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로 저를 아는 듯한 말투였다.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그러다가 왔데이. 팬미팅 한다캐서! 내 조금 많이 늦긴 했지만,"
신호등 불빛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남자는 신호등을 건너 슈에게 다가갔다. 똑바로 치켜뜬 눈을 보아하니 스스로는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비틀비틀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그렇게 안달이 날 정도로 느린 걸음에도 이츠키 슈는 도망치지 않았다. 사나운척하는 눈동자가 맑다.
"어찌되었든 내도 팬이니까는. 만나주면 안되나?"
"팬미팅은 이미 오전에 끝났다는거다. 순순히 돌아가는게 좋을게다."
남자는 기어이 슈의 지척에 도달해서야 말을 마쳤는데 슈는 억지를 부리는 모습이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무엇을 믿고 저리 당당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뭐고, 아직도 그런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데. 말투도 여전하구마."
아까부터 정말로 저를 아는 양 행동하는 남자가 슈는 대수롭게도 신경에 거슬렸다. 돌아가라고 말했더니 되려 말투를 잡고 늘어져 쿡쿡거리더니, 이제는 대놓고 아하하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가볍게 주먹 쥔 손을 입가에 올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은, 어릴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비록 가느다란 손은 조금도 관리가 되어있지 않아 이리저리 트고 거칠어져 있어서 그 꼴을 본 막내 도련님이 주머니의 핸드크림을 쥐었다가 놓았더랬지만 그런 것쯤이야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미소가 아름다웠다. 아무리 눈앞에 있는 사생팬 남자가 비인도적인 짓을 벌이고 있다지만 그의 솜씨 하나만은 인정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나치게 웃음이 헤프다. 이츠키 슈는 그제서야 행인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줄곧 그 자리에 있었던 시선들이 백 배는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저 앞에 있는 것에게도 분명 그 불결한 것들이 향하고 있는데 속 모르고 웃고 있다니. 괜스레 남자를 질책했다.
"웃기는 잘 만 웃는구나. 뭐,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두라지. 그보다 친근한 척 말 걸지마라. 겁도 없이 카게히라의 흉내를 내는 잡놈 주제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네 놈의 모든 행위가 거슬리던 참이니."
"슈 군... 아까부터 와 그러나 했는데, 설마 내 죽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제?"
남자가 '설마?'라고 생각하고 있을 법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개폐 장치의 스위치가 올라간 것처럼 제 할 말을 쏟아내던 슈가 다시 스위치가 내려간 것 마냥 입을 닫았다. 순식간에 굳어지는 얼굴을 보며 남자는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설마!'
"아니면 카게히라가 유령이 되어서 살아나기라도 한 게냐? 그렇다면 왜 가장 먼저 나를 찾아오지 않았는지, 묻고 싶구나."
한참이나 말이 없던 입술이 뱉어낸 말은, 태어나자마자 냉동실에 갇혔다가 이제서야 밖에 나온 듯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제까지도 살갑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차원이 다른 냉랭함이었다. 꽤나 충격을 받은 건지 멍하게 서있는 남자를 비웃 듯 슈는 입가를 휘었다.
그러나 이츠키 슈의 날카로운 비소를 잠시 눈에 담던 남자는 물러서기는커녕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도리어 인상을 확 구겼다. 눈썹 끝이 위로 들렸지만 눈매는 어딘가 축쳐져 보여서 화가 났다기보다는 황당하고 속상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이구... 진짜로 그런가 보네. 저기, 걱정...은 고마운데 내 완전 멀쩡히 살아있다. 슈 군이 그렇게 가고 나서 이틀 쯤 뒤에 나았던가. 슈 군이 준 인형을 꼭 안고 잠들었는데 하루아침에 열이 싹 내려갔데이. 어른들은 기적이었다고 하더라. 이게 다 그 인형 덕분 아니겠나? 지금은 이렇게 집 열쇠에다가 달고 다닌다. 귀엽제?"
인상을 구길 땐 언제고, 금세 활짝 웃던 남자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키를 꺼냈다. 찰캉,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낸 키는 그 본체보다도 열쇠고리로 추정되는 것들이 더 눈에 띄었는데, 기괴한 장식과 귀여운 장식이 한데 어울려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괴상한 비주얼보다도 '안 무거운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충격적인 양이었다. 왜 주머니가 아니라 가방에서 꺼내나 했는데 역시 그에게도 무거운 듯하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열쇠고리 무더기만 바라보던 슈는 무더기 속에서 익숙한 곰인형을 발견했다.
"이건...?"
"응, 맞데이. 이름도 지어줬는데 슈 군의 이름에서 따와가 '슈웅'이라 안카나."
'발사체가 날아가는 것을 표현한 듯한 이름이군.' 슈는 가까스로 말을 삼켰다. 한쪽 뺨에 손을 얹은 채로 귀여워 죽겠다는 듯 눈을 접어 웃는 남자를 보니 어쩐지 말로 하기가 민망해서. 어찌 되었건 주렁주렁 매달린 다른 것들이 상하지 않도록 인형을 조심스레 손에 쥐어보니 재질이며 튼튼하지만 약간 어설픈 바느질까지 어린 슈가 만들어 카게히라에게 선물했던 그 인형이 틀림없다. 아무리 지독한 사생팬이라도 그런 것까지 흉내 낼 수 있을 리는 없을 테다. 그렇다면... 정말로 카게히라 인건가?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집 열쇠? 혼자 사는 건가?"
"응. 내 자취도 했구... 암튼 잘 살고 있다."
“호오... 이제 너도 마냥 어린 아이는 아니니 주민등록증도 있겠구나.”
“당연하제! 내는 생일이 연말이어가 나중에야 받았는데...”
슈는 일부러 떠보듯 말을 꺼냈다. 다행히도 남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자랑하듯 건넸다. 이 남자가 진짜로 카게히라라면, 순수하다 못해 이다지도 단순하다는 것을 비관해야 하나 기뻐해야 하나. 슈가 한숨을 푹 내쉬니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슈는 아랑곳 않고 건네 받은 얇은 카드 한 장을 살폈다. 긴장했던 건지 입술이 꼭 다물린 상태로 찍힌 남자의 사진 옆으로 '카게히라 미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여러 번 다시 읽고 높이 들어 이리저리 기울여보기도 했지만 틀림없이 그 이름이 새겨진 면허증이다. '카게히라'는 그림자의 파편, '미카'는 뜻이 없는 글자였구나.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슈는 생각했다.
어린 그에게 이런 등불은 또 없었는데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지날 때 등대처럼 '이쪽이다!' 손을 잡아끌어주는 철모르는 어린애가 그리워서 소리 없이 울었던 밤과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혼자 고뇌하던 새벽녘. 그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잔상처럼 남아있던 카게히라의 기억 덕분이었다. 그 밝음을 잊지 않았다. 몇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카게히라의 곁은 훤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 애는 진흙 속에서 자란 듯했지만 맑았다. 감히 누가 더럽힐 수 있을까, 하는 듯이. 그래.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그걸 두려워할 것은 또 뭐냐고. 조금 전까지 질겁을 했던 스스로가 우스워서 슬쩍 입꼬리를 올리자 옆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증명사진도 내랑 똑같이 찍혔구, 이제 믿어지제?"
"그래."
"슈 군?"
"하는 짓을 가만 보고 있자니 영 아둔한 것이... 카게히라가 틀림없구나."
"그게 오랜만에 할 말이가? 슈 군은 바보!"
슈는 남자, 카게히라의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시 보니 참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 의심했던 것이 스스로 어이 없어질 정도다. 몸이 자라나면서 어릴 적과는 달라진 것도 있었지만 카게히라 본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햇볕을 받으면 신록의 빛깔로 반짝이는 까만 머리칼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맑은 다른 색의 두 눈동자. 세월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으리.
심지어 성격까지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농담이 아니라, 약간 아둔한 것이 어릴 때랑 판박이다. 밉살스럽지 않다는 점도 꼭 같고. 험한 길을 달려나가려는 어린 카게히라를 타박하려다가 해맑은 아이를 이기지 못하고 이끌려 나간 날이 있었다. 바보 같은 일만 골라 하는 카게히라가 드물게도 싫지 않았다. 처음 느낀 생소한 감정이 신기루처럼 줄곧 뇌리에 남아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명이인인지 본인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대뜸 이것저것 내밀었던 건 조금 심했다. 지나치게 경계심이 없는 거라든지, 아무렇게나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일에 대해선 조만간 이야기를 해두어야겠다. 물론 '조만간'이므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모처럼의 재회인데 두 번째 만남의 첫인상―카게히라의 표현.― 이 모양이니 당분간은 별 탈 없이 평화롭게 둘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아직은 물어볼 것도 있고.
"네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응아?"
"여전한 말 버릇이구나. 아니, 이게 아니지. 얼굴은 왜 숨겼던 게냐? 바람이라도 불지 않았다면 평생 너인지 모를 뻔했구나."
"그게... 슈 군 놀랄까봐 그랬다이가? 슈 군은 내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는디 갑자기 찾아와가, '내 카게히라데이!' 하면 놀랄까봐."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츠키 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때의 강풍이 아니었다면 스스로를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던 건가? 생각하니 아찔하고, 강풍에 감사했다. 그리고 괘씸했다. 그 약속을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다니, 대체 자신을 얼마나 무심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실망스럽다는 게야. 다시 만나기로 약조했거늘, 너를 잊었을 리가. 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였던 게냐? 또 다시 나를 잃어버린다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찾아오도록. 나 또한 그럴테니."
"응! 새겨두겠데이!"
"건성으로 듣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염려된다는 거다."
슈의 말에 카게히라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하, 막힘없는 소리였다. 슈는 그 소리를 듣고서 옅게 미소 짓는 것 같더니 곧바로 듣지 않으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짱을 끼고 상체를 조금 굽혀 카게히라와 눈을 맞췄다. 마치 꾸짖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릴 때에 늘 그랬던 것처럼. 오묘한 자안이 두 개의 눈동자를 사로잡는다. 호박도 청금석도 아름다운 보랏빛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홀린 듯 한참이나 눈을 맞추던 카게히라는 이제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눈동자를 깜빡깜빡 거리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슈의 눈에는 까마귀가 몸을 터는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듣고 있었다이가? 내 앞으로 잃어버리는 일 없게 슈 군한테 붙어있기로 했다."
"그래, 가라고 해도 가지 말거라."
"그카믄 내 진짜로 가라고 해도 안 간다."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마주 보았다. 몇 년도 전에 인연이 끊어져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의 앞에 있었다. 이츠키 슈가 카게히라를 오래도록 애도하기 위해 써내려갔던 동화, 두 사람의 피크닉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던 그 동화는 억지로 자아낸 해피엔딩을 맞았지만 그 책 한 권으로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닿아 실제로는 조금 달라질 예정이었다. 아니, 조금이 아니었다. 만약 이야기를 다시 동화로 쓴다면 그건 아주 고된 노동이 될 것이다. 장편이 될 것 같으니. 아직은 그 긴 이야기가 어떤 페이지들로 채워질지 알 수 없지만 옛날 옛적 왕자님과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가 늘 그렇듯 아마 이야기의 결말은 단 한 가지. 고전 동화의 내정된 결말, 이츠키 슈는 항상 심도 있는 고찰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 결말을 매몰차게 깎아내리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슬쩍 눈 감아 주기로 했다.
멋진 합작 열어주신 주최자분께 감사드립니다!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슈미카 하시는 모든 분들의 오늘 하루가 슈미카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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