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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

글 / 제피 / 굴뚝새의 유리집에서

* 동화 [푸른 수염] 모티브 / 제목은 사라 키르쉬의 동명 시에서 인용

* 언젠가, 어딘가의 AU입니다.

* trigger warning: 집단 내 따돌림과 폭력, 사망, 아동학대를 묘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천 BGM: la valse des monstres - yann tiersen (https://soundcloud.com/tre-232668581/la-valse-des-monstres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어둑어둑하게 해가 져 버린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고로 아이들이란 저마다 그 자그마한 몸뚱이에 악마를 한 마리씩 기르고 있는 법이라서, 부모의 말을 어기고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도 놀이를 끝내지 못하기 마련이다. 걱정이 담긴 단순한 경고로 아이들의 이른 귀가를 장담할 수 없었던 부모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자신의 아이를 통제할 수단으로써 공포심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대개 항간에 떠도는 괴담들은 이런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다. 터부시되는 것들, 금기로 지정해 마땅한 것들, 혹은 지켜져야 하는 비밀들을 위해서. 

 

 마을을 감싸안은 모양의 자작나무 숲은 대낮에 들어가도 그림자를 찾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다. 아이들을 홀리기에 충분히 웅장하고 아름다운 이 백색 거인들의 살갗을 가르고 들어가면 족히 몇십 년 동안은 버려져 있었던 게 분명한 저택 하나가 시치미를 떼고 우뚝 선 형상은 무릇 보는 이들의 스산한 두려움과 무모한 모험심을 동시에 부추기고는 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영원한 어린 아이들로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자작나무 숲의 심장까지 들어가 저택을 본 아이들도 어른이 되었고, 그들은 약속한 듯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았다. 자작나무 숲의 저택을 휘감은 소문도 세대를 거치면서 새끼를 쳤다. 소문에 따르면 저택은 대부호가 자식을 잃어 통째로 무덤이 된 통곡의 카타콤이 되기도 했고, 악한 마녀들이 악마와 지저분하고 음탕한 성교를 나누는 회담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지방 호족이 투기가 많은 정실 부인 몰래 첩을 숨긴 별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저택에 접근할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는데, 저택에 얽힌 소문이 몇 대를 거듭해 각색돼도 동일하게 구전되어 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자작나무 숲의 버려진 저택을 방문한 사람에게는 끔찍한 저주가 들러붙는대. 그 저주가 얼마나 독하냐면, 살아서는 절대 풀 수 없더란다. 그래서 저택은 다시 여러 해 동안 홀로 낡아갔다. 마을의 사람들도 점차 저택의 존재를 저주와 함께 잊어갔다. 저택에서 마을로 초대장을 보내오기 전까지는.

 

 '선물'을 처음 가져온 것은 마을에서 보모 역할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소년이었다. 카게히라 미카, 지구 전역을 방방곡곡 돌아다닌다는 집시 유랑단이 마을에 꿈결처럼 들렀다 사라졌을 때, 마치 실수처럼 남기고 간 아이. 젖도 떼지 못한 것의 처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카게히라는 울지도 않고 가만히 그들의 결정을 기다렸다고 한다. 조르고 떼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딱한 것, 저것도 자기 버려진 줄을 아나 봐요. 누군가가 중얼거린 탄식에 힘입어 어린 카게히라는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식되었다. 기댈 나무가 없는 곳에서 홀로 땅을 기어다니며 자라는 덩굴손처럼, 카게히라는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알았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욕심이다. 카게히라는 마을에서 자란 이래로 온전한 자신의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입는 것은 마을 사람 누군가가 입던 것을, 먹는 것은 아이를 돌봐주느라 묵고 있는 집에서 감당했고, 자는 곳은 마을 헛간을 개조한 다락방에서 해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생존에 더욱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손에 쥔 장난감을 조르는 동생들에게 장난감을 줘 달래지 않으면 그 부모의 눈초리는 얼음장보다 매섭게 카게히라를 향했다. 버려진 것이 욕심도 많지! 저렇게 탐욕스러운 것을 어디에 써? 언젠가는 아이를 맡겼던 마음씨 좋은 부인이 카게히라에게 사탕무로 만든 홀 케이크를 온전히 그 애의 몫으로 대접한 적이 있었지만, 몇 입 먹지 못하고 탈이 났다. 카게히라에게 케이크를 건네는 모습을 본 그집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카게히라는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오래 가지고 있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자신의 것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발신인을 저택으로 두고 있는 정체불명의 소포도 지체 없이 마을의 공동체로 전달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으레 모이곤 했던 공터로 집결했다. 카게히라의 삶과 죽음을 가른 곳도 이곳에서였다.

 

 카게히라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소포 꾸러미를 가져온 것은 검은색 말을 탄 존재였다고 한다. 다락방을 빠져나와 아이들을 보러 가는 길목에 못 보던 말 하나가 멈춰 있더란다. 그 옆을 조심조심 지나가는데 보란 듯이 꾸러미가 발치로 떨어졌다고 했다.

 

 다들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증언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카게히라가 검은색 말에 올라탄 것이 사람이 아닌 재투성이 같은 색의 흐릿한 연기덩어리였다고 덧붙이자 등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불쾌감에 더 캐물을 생각조차 사라진 눈치였다. 물밑을 오가는 눈빛들 속에서 카게히라는 수십 년 동안 언령으로만 남아있던 저택의 저주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역할에 낙점됐다. 수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물건은 먼저 발견한 사람이 열어 보는 거랬어. 어쩌면 카게히라에게 주는 선물 아닐까? 카게히라의 부모라든가, 친척이라든가……. 누군가가 지껄인 출처가 불분명한 말을 시작으로, 카게히라는 긴장감과 집중된 이목 때문에 상기된 얼굴로 꾸러미의 주둥이를 잘 여민 끈을 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소포는 카게히라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었다. 여는 사람에게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붓지도 않았다. 다만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물체의 실루엣에 장내의 소란이 모두 소거된다. 카게히라가 아직 초점에 잡힌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내리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다가, 대신 대답을 말해 줄 누구라도 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카게히라의 주변을 둥글게 둘러싸고 조촐한 개봉식을 구경하던 인파 중 누구도 쉬이 결론을 내려 주지 못했다. 그때 천진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미카 형, 이 인형 미카 형아한테 온 거야?”

 “으, 응?”

 “너무 예쁘다! 나 주면 안 돼?”

 “얘는, 소우! 시끄럽게 떠들 거면 안 데려온다고 했지!”

 “그치만 이렇게 예쁜 걸, 나도 가까이에서 볼래!”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카게히라가 다시 인형에게 시선을 붙였다. 꾸러미 안에서 나온 것은 눈을 감고 있는 아름다운 앤티크 인형이었다. 카게히라는 감히 아름답다는 단어를 붙여 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마주한 아름다움의 실체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할 단어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가느다랗고 힘없이 나풀거리는 금색 모발과 유리처럼 매끄러운 흰 피부를 가진 인형은 파스텔 톤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천사가 실존한다면 그건 분명히 이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겠지……. 카게히라에게도 느슨한 미소가 걸린다. 아름다움은 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법이니까. 그때였다.

 

 눈을 감은 인형이 끼긱, 끼기긱, 녹슨 것들 특유의 불쾌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가볍기 짝이 없는 발걸음으로 살포시 꾸러미를 푼 흔적이 여실히 남은 테이블 위에 자력으로 일어선 그것이 더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짝 없는 왈츠를 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따금씩 인형 주변으로 빛의 입자 같은 실의 움직임이 언뜻 드러났지만 눈치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만 충격적인 침묵에 빠진 침묵을 날카롭게 가르고 다각, 다각, 구둣발이 테이블 위로 이따금씩 스텝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이 저주의 실체라도 되듯이 경악한 사람들과는 달리, 오직 카게히라와 잠이 덜 깬 아이만이 눈을 빛내면서 춤추는 천사의 동선을 시선으로 덧그리며 따랐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두 사람의 눈에는 일정한 곡선을 그리면서 춤추는 천사의 등 뒤로 돋은 날개가 보였다. 감히 손을 뻗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카게히라가 멈춘 시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을 동안, 소우는 조금 달랐다. 소년이 날개에서 흩어지는 비늘가루 같은 빛의 산란으로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팅

 

 팽팽하게 당긴 실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잠시 접어 둔 시간이 어린아이의 천진한 손끝으로 무너진다. 소우의 손가락이 인형의 옷깃에라도 닿은 찰나, 인형이 즉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파도에 밀린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손대지 말라고 했잖니! 그러다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이 망할 것!”

 “어…… 어……”

 “저주 걸린 인형을 마구 손대게 하면 어떻게 해? 애 엄마가 잘 잡고 있었어야지!”

 “애초에 아이를 여기 왜 데리고 와요?”

 “인형을 망가뜨렸으니 그 노여움을 누가 받을지, 원…….”

 

 

 뒤늦게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뒤로 숨기면서 방금 전의 장난을 질타하는 것을 시작으로 장내에 가벼운 소란이 인다. 비난의 주체는 이제 아이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작부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홀로 움직이는 인형이 시사하는 바를 추측하는 추론이 난무하는 가운데, 결국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은 막 울음을 터뜨린 소우였다. 

 

 

 “아파아! 그렇게 잡지 말란 말이야!”

 

 

 어미의 손이 어깨를 아플 정도로 쥐고 있던 것을 뿌리치면서 소우의 입술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이 작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지탄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지 체득한 여인이 억센 손아귀에 무심코 힘을 주고 만 것이다. 부모의 품을 떠난 아이가 낯선 분위기와 격통에 당황해 눈물이 일렁거리는 얼굴을 하고 아직 넋이 빠져 있는 카게히라에게 익숙하게 가 안겼다. 그동안의 학습으로 소녀는 부모도 자신의 편을 쉬이 부릴 수 없는 어리광이 카게히라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찢어지는 비명이 훌쩍훌쩍 서러움으로 변할 즈음, 이제는 아이가 카게히라의 품에 뺨을 묻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미카 형아, 나 벌 받는 거야? 인형을 망가뜨렸으니까 혼나는 거야? 싫어, 무서워!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숨을 곳을 찾는 토끼처럼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몸이 굳어 있던 카게히라도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키가 큰 어른들의 날이 선 눈초리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듯이 두 손으로 소우의 등을 토닥거린 카게히라가 서툴게 위로를 시작했다. 

 

 

 “뚝 하자, 응? 여기 혼나야 되는 나쁜 아이가 어데 있다구. 소우는 착한 아이제?”

 

 

 응, 응, 착한 아이. 소우에게는 들릴 정도로 작은 카게히라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니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나 히끅거리는 울음이 가라앉을 틈도 주지 않고, 소우의 엄마가 덜 자라 가느다란 손목을 억센 힘으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얼굴이 부끄러움과 당혹감으로 붉어진 그녀는 화가 난 목소리로 아이를 윽박지른다.

 

 

 “소우! 이 말 안 듣는 망아지 같으니라구,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고서라도 저 주책을 고쳐 놔야지. 내가 못 살아! 이리 안 와?”

 “싫어……! 인형이 먼저 만져 보라고 했단 말야!”

 “뭐, 뭐? 얘가!”

 

 

 여자의 손이 허공에 헛도는 사이, 소우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카게히라의 등 뒤에 숨으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서리로 된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가워졌다. 마을에서 이질적으로 판명된 존재가 마을 밖에 버려져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카게히라는 알고 싶지 않아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카게히라의 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이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변호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저 여자 또한 그렇겠지. 카게히라가 생각하기에 저택의 불길한 존재가 안겨 준 선물에게 간택당한 제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멍에는 이 어린 나이의 아이가 가져가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러니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애한테 손대지 말그래이! 내도,”

 

 

 기꺼이 대신해 주리라.

 

 

  “내도 인형이 말하는 걸 들었데이.”

 

 

 모두가 카게히라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른들의 사정으로 그날 인형을 망가뜨린 이는 소우가 아닌 카게히라로 은밀하게 바뀌었다. 망가진 인형을 정성스럽게 갈무리한 가방을 든 카게히라는 이른 새벽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길을 떠났다. 곧 마을 밖으로 쫓겨날 처지에 놓인 것이 자신의 아이와 친하게 지내 기뻐할 만한 부모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어쩌면 인사는 하지 못한 것이 맞다. 소란이 끝난 후 겨우 발언권을 얻은 카게히라는 자신이 망가진 인형을 가지고 저택의 주인에게 가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소우를 때리지 말아 달라는 말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하고 나왔으니 마음은 홀가분했다. 그게 마을 밖을 나서는 발걸음까지 가볍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숲은 고요하고 음산했다. 암흑을 읽을 수 없는 카게히라의 눈으로는 더더욱. 몇 번을 침묵 속에서 눈을 깜빡여 봤지만 야맹증을 오기로 고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나마 마을에서 가져온 등불이 밝혀 주는 몇 미터 간의 시야가 없었더라면 정말로 눈 뜬 장님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도도 표지판도 없긴 하지만 아무 수확 없이 마을로 돌아가면 안 될 일이다. 카게히라는 겁에 질린 아이가 부모가 아닌 자신의 품으로 들이닥치던 때를 곱씹었다. 다음 걸음으로 발을 뗄 수 있게 하는 것은 카게히라가 품고 있는 모종의 책임감이었고, 등을 떠밀어 주는 것은 기저에 가라앉은 죄책감이었다. 

 

 얼떨결에 맡게 된 일이라고는 하지만 카게히라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자신이 받지 못한 보살핌을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좋았다. 술주정을 부리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나온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이 좋았고, 심하게 매를 맞아 부푼 다리에 약을 발라 주면 고마워, 하고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좋았다. 그런데도 항상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지긋지긋한 마을을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폐쇄된 시골 마을에서, 부모가 아닌 카게히라를 의지하는 아이들이 있는 곳을 내내 떠나고 싶었노라고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지만, 드넓게 펼쳐진 숲속에서 카게히라는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다. 구명도구처럼 쥐고 있는 등불이 시야를 확보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카게히라의 걸음이 뒤늦게 조급해졌다. 꼭 지저에 존재한다는 괴물들의 무간지옥을 걷는 불청객이 된 기분이 든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안전은 그 어디에서도 보장될 수 없다. 카게히라가 숨을 깊게 삼켰다. 눈을 감고 걷는 것과 눈을 뜨고 걷는 것의 차이가 크지 않아 의미는 없었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걷던 카게히라의 몸이 불시에 기울어졌다. 앗, 탄성을 지르기에도 앞서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둔중한 통증이 전신을 오싹하게 기어올랐다. 마귀할멈의 주름진 손아귀처럼 엉망으로 얽히고 설킨 나무뿌리가 기어코 발목을 잡은 모양이었다. 카게히라가 무너진 몸을 다시 수복할 때를 틈타 놓친 유일한 광원은 저 앞을 데굴데굴 구르는가 싶더니 수직으로 푹 꺼지고 말았다. 지근거리에 낭떠러지가 위치했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련의 사고를 겪은 카게히라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조금만 더 걸었더라면 지금쯤 저 끝을 유추할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이 등불이 아닌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까지와의 것과는 결이 다른 본능이 등골을 쭉 타고 올라왔다. 방금 전까지 죄책감이나 책임감 같은 의무를 논하다니 우스웠다. 카게히라가 당장 직면하고 있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책무가 아닌 죽음의 공포였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그건 살고 싶다는 문장과 동의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카게히라는 눈앞에서 자신의 손바닥이 무슨 모양을 하고 있는지조차 볼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죽음이 최후라면 지금까지 아등바등 발버둥치며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다. 아니,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혹한의 추위와 볼 수 없는 어둠뿐인 세계가 이 삶을 이루는 씨실과 날실이라면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움을 이 두 눈에 담을 수 있다면.

 

 카게히라가 비틀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꽉 찬 보름달이 텅 빈 하늘을 홀로 감시하고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위로 맹금류의 눈동자처럼 우뚝 찬 달은 이유 모를 장엄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달빛이 아름다워서 그만 눈물이 날 뻔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이 나는가. 괜히 시큰해지는 코 때문에 눈가를 가볍게 문지른 카게히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한치의 일그러짐 없이 완벽한 구형을 이루던 달님이 이지러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죽을 때가 다 돼서 나타나는 착시일까 싶어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둥근 달이 아래로 감긴다. 초승달이라면 손바닥이 겹쳐지듯이 세로로 사라지지 않나? 카게히라가 혼란스럽게 상식과 괴현상의 오류를 짚어내려는 그때, 숲 전체에 빛과 함께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회백색의 나뭇가지들에 황금색의 실이, 그것도 수만수천 개의 실들이 가벼운 미풍에 나부꼈다. 한낮처럼 밝아진 주변은 축객령 대신 오솔길 하나를 열어 주듯이 비춘다. 마치 달이 황금빛의 실들로 녹아내린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카게히라는 녹아내린 달의 죽음이 남긴 루미나리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이 금빛 물결이 이끄는 곳으로 간다면 천국의 문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문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도 문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는 있을 것이다. 만나 본 적 없는 신도 그 정도의 자비를 기꺼이 베풀어 주실 것이다. 빛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길의 끝에 커다란 저택의 실루엣이 보였다. 카게히라는 본능적으로 그곳이 온갖 뜬소문과 낭설을 오랫동안 외투처럼 걸치고 있었던 숲의 심장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마지막 사실을 상기한 카게히라가 이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저기에 인형의 주인이 있다. 

 

 

 

 

 

 

 빠르게 걸음을 재촉할수록 트인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눈부시게 흩뿌려지던 섬광이 잦아들고 있는 탓이다. 대신 싱그러운 장미 향이 훅 후각을 파고들어왔다. 저택 전체를 둥글게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가시덩굴과 장미꽃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다리나 팔이 이따금씩 따끔거린다 했는데 빛을 따라 가는 데 정신이 팔려서 가시덩굴을 조심조심 누르며 비집고 들어온 모양이다. 사실은 이런 꿈 같은 풍경을 언제 또 볼까 싶은 아쉬움이 들어 되도록 모든 것을 오래 오래 눈과 머리에 담아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새벽에 맺히는 이슬도 아침이면 태양빛에 떠밀려 사라지는 법이라고 했다. 카게히라는 배낭의 끈을 두 손으로 쥐었다. 회벽칠이 되어 있는 석조 건물은 생각보다 투박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택보다는 마치 요새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전면으로 나 있는 아치형의 창문들이 건물의 규모에 비해 작았을 뿐더러 현관으로 추정되는 문은 문고리가 뽑혀 있어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그나마 저택의 최상단에 위치한 장미창만큼은 카게히라의 눈으로 보아도 찬찬하고 세밀한 솜씨로 세공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겨우 초대장을 거머쥔 기분이 들었는데 이래서는 안으로 들어갈 수도, 마을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할 수도 없다. 노크를 하기 앞서 카게히라가 현관문 앞으로 바짝 다가가 붙었다. 두 손을 차가운 현관문 위로 바짝 붙이고 뽑혀나간 문고리로 눈을 가져다 댈 때였다. 

 

 

 “쥐새끼 같은 속물 놈이 감히 어딜 엿보는 게냐!”

 “응앗!”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전에 청천벽력 같은 불호령이 카게히라를 다그침과 동시에 몸이 바깥쪽으로 밀려났다. 눈 앞에서 벼락을 막 목격한 사람처럼 혼이 빠져 나동그라진 카게히라의 앞으로 스스로를 꽉 여며 두었던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저택의 밖만 보아서는 절대로 예상할 수 없는 호화로운 내골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을 두텁게 덮고 있는 화려한 융단이었다. 첨예한 장식을 조각한 기둥이 받치고 서 있는 로비의 뒤로 탁 트인 층계가 두 갈래로 나뉘고, 언뜻 보기에도 정교한 태피스트리가 벽면에 걸려 있었는데, 카게히라는 당장 그 태피스트리가 무엇을 직조한 작품인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볼썽사납게 넘어진 카게히라의 앞에 불쾌감을 여실하게 드러내며 고압적으로 턱을 치켜들고 있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는 즉시, 솔직히 말하자면,

 

 

 “네 입술과 혀는 장식인가?”

 

 

 엄청 혼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 오해다! 엿보려고 칸 건 아니고 사람이 읎는 집일까 봐 그랬데이! 내,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가…….”

 “뭐라?”

 

 

 카게히라는 일단 얼른 고개를 저었다. 가능하다면 손을 같이 저었겠지만 다급하게 맨 배낭을 앞으로 돌리느라 두 개밖에 안 되는 팔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척 보기에도 내로라 하는 장인이 정성스럽게 몇 개월을 주물렀을 것이 뻔한 코트 자락을 가볍게 휘날린 남자가 허리춤에서 새의 부리 모양이 손잡이에 새겨진 스틱을 손에 쥐었다. 탑햇에 뚫린 구멍으로 검은색 산양의 뿔이 위협적으로 솟아 있는 그는 카게히라가 원하는 해명을 내놓지 못한 데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평안을 방해받은 붖꽃색 눈동자가 차가운 분노 때문에 시시때때로 일렁거린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듯이, 남자가 스틱의 기둥을 한 손에 잡고 다른 손으로 스틱의 손잡이를 우악스럽게 뽑아냈다. 

 

 

 “이 인형의 주인을 찾으러,”

 

 

 날카롭게 벼려진 검의 나신이 샹들리에의 조명을 받아 반짝임을 산란하면서 카게히라에게 향한 것과 카게히라가 배낭에서 막 꺼낸 앤티크 인형을 그에게 보이는 일은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고개를 들자마자 눈에 들어온 뾰족한 첨단에 카게히라는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리고 말았다. 수 초 간의 어색하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남자는 이제 카게히라가 아닌 카게히라의 손에 들린 인형을 말 없이 쳐다보더니 검을 거두었다. 

 

 

 “함부로 찾아왔다면 그대로 비명에 보냈을 미물 주제에 피를 묻히는 것도 껄끄럽겠군. 사랑하는 마드모아젤의 옷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 오늘 목숨을 건진 일을 일생일대의 행운으로 알거라.”

 

 

 영문 모를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지팡이의 용도로 돌아간 스틱의 손잡이를 한쪽 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리고 들판에 부는 밤바람처럼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묻는다.

 

 

 “나의 마드모아젤, 여행은 즐거웠는지? 그러게 새 인형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흠?”

 

 

 마치 인형과 대화라도 하듯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인형을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카게히라에게 가 닿았다. 그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카게히라가 단번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인형의 뒤로 자신을 밀어넣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연속의 과정을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남자가 대놓고 혀를 찼다. 저런 차가운 눈길은 차라리 익숙했다. 마드모아젤이라고 불렀던 인형을 바라보는 눈빛에 뒷편의 카게히라가 깜빡 속아 버릴 뻔했으니 역으로 잘된 일이기도 했고.  

 

 

 “그래. 그렇게 된 거로군.”

 

 

 분명 들리는 말소리는 하나뿐인데 놀랍게도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남자는 진지한 모습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기까지 한다. 남자가 성큼 카게히라의 앞으로 다가와 마드모아젤을 섬세한 손길로 안아들었다. 그리고 휙 몸을 돌렸다.

 

 

 “돌아가거라. 마드모아젤을 데려온 공을 사 귀가를 도와주도록 하지.”

 “……응아?”

 “못 알아들은 게냐? 썩 꺼지란 말이다.”

 

 

 여태 어정쩡한 자세로 앉은 카게히라를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넘겨 본 남자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카게히라가 얼떨떨한 얼굴로 우선 몸을 일으켰다. 정말 이렇게 끝이 나도 되는 건가? 이대로는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층계를 막 오르는 남자에게 맥 없는 질문을 던진다.

 

 

 “저기, 그럼 악마 씨…… 우리 마을에 저주는 내리지 않는 기가?”

 “그런 귀찮은 일을? 내 이름은 악마가 아닌 이츠키 슈다.”

 “이츠키 씨! 참말로 그냥 용서해 주는 거가? 마, 마드모아젤 씨는 많이 다친 게 아니가? 아참! 이름을 들었으니 내도 알려 줘야제, 내 이름은 카게히라……”

 “시끄러운 놈! 그만 입 다물라는 거다. 네 이름따위를 궁금해할 것 같으냐? 마드모아젤은 멀쩡해. 그녀는 나의 새 인형을 찾기 위해 잠시 정행 중이었다는 게야. 애초에 마드모아젤이 선택한 인형은 네가 아니었잖아?”

 

 

 정말로 그 애는 인형의 말을 들었었구나. 말을 가로막힌 게 벌써 두 번째다. 애초에 처음 무시당했을 때에는 심경이 요동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의 말은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어 비트는 구석이 있다. 어깨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갑갑해진다. 열외의 인간이라는 취급은 익숙하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있으면 굳이 쳐낼 필요는 없지만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 무게를 덜어내야 할 때면 가장 먼저 밀려나는 보호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 이런 수식어는 카게히라의 인생을 설명하고 수식하고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도 슬프지 않아야 했다. 부모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가족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가질 수 없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무엇이 자신의 기쁨인 줄도 모르는 채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카게히라가 맥없이 빈 주먹을 움켰다. 머릿속에서 뒤엉켜 둥둥 떠다니는 문장 중 하나라도 얼른 낚아채 내밀어야 했다. 그래서라도 저 뒷모습을 돌려야 한다는 충동이 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와 이츠키 씨의 인형을 마드모아젤 씨가 선택하나?”

 

 

 이윽고 층계를 오르던 발소리가 멎었다. 뒤이어 이츠키가 천천히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냉혹한 분노로 서리꽃이 얼 것만 같은 서슬퍼런 안광이 카게히라의 형편없이 더러워진 행색을 그대로 비추었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지?”

 “…….”

 “말해.”

 “이츠키 씨의 인형은 이츠키 씨가 선택하는 기다.”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칼바람이 되어 뺨을 마구 할퀴는 것 같았다. 덜컥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시간을 돌린대도 다른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번 목을 겨눴던 칼끝이 이번에도 쉬이 목표를 용서하는 행운이 두 번 올 것 같지도 않으니 이쯤에서 눈을 감는 게 나으려나. 언제든 눈을 질끈 감을 준비를 하고 숨을 삼키는 찰나였다. 목을 노리는 단죄의 칼날도, 그에 상응하는 날카로운 꾸지람도 없었다. 대신 카게히라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두 번째의 행운을 바로 만나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어머. 슈 군, 한 방 먹었네.’

 

 

 인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적 같은 것을.

 

 

 

 

 

 

 꼼짝없이 내쫓길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인지 이츠키는 카게히라를 쫓아내는 것 대신 철저히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 같았다. 정식으로 초대한 손님이 아니니 제대로 된 방을 내 주거나 식사를 대접해 주는 일은 없었지만 종일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저택은 머리를 바닥에 대면 아무 곳이나 훌륭한 침실이 되었고, 호화찬란한 주방에는 늘상 신선한 식재료가 완비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빵을 굽는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쭈뼛거리면서 주방으로 향하면 말끔한 은쟁반에 갓 구운 크루아상이나 파이가 노릇노릇하게 놓여 있고는 했다. 참 솔직하지는 못한 사람이다 싶다. 같은 공간에 거주하는 것만은 확실하건만 카게히라는 첫 번째 날 이후 이츠키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마치 카게히라가 가는 곳을 미리 알고 이츠키가 먼저 자리를 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카게히라는 이 투명한 동거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주일이 지나자 식기와 침구의 정리정돈은 시키지 않아도 할 정도로 위치 구분이 용이해졌고, 몇 달이 지난 이제는 꽤 대담하게도 저택 밖의 정원을 빙빙 돌아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밖으로 나갔을 때 다시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은 불안감이 들어서 신발 한 쪽을 끼우고 나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현관에는 보기 흉한 구멍 대신 금장 문고리가 제위치에 달려 있었다.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을 걷다가 무심코 저택으로 고개를 돌리면 좁은 창문들 중 하나가 황급히 커튼을 치곤 했는데, 카게히라로서는 그런 감시가 고마웠다. 비공식적으로나마 이 곳에 잔류하는 것을 허락받은 느낌이 들고 마는 걸 보면 이츠키의 말대로 단단히 나사가 빠져 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깜빡깜빡 시야가 명멸한다. 오늘은 거실의 기둥 뒷쪽에서 쪽잠을 청하던 카게히라가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폭우 소리에 잠을 깼다. 빵 굽는 냄새가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침이 아닌 긴가, 하고 중얼거린 카게히라의 눈이 벽면의 자명종 시계로 가 닿았다. 아침 열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는 균일한 간격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처럼 묵직한 느낌이 든다. 카게히라는 이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버려진 것들 특유의 막막한 불안감으로 비죽비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츠키 씨?”

 

 

 대답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괜히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이츠키 씨, 여기 없나?”

 

 

 난간을 분주하게 오르내리는 발걸음이 바쁘다.

 

 

 “이츠키 씨, 거기 있제!”

 

 

 기어코 방문 하나하나를 여는 사단을 냈는데도 이츠키의 머리카락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카게히라가 정신 없이 현관문을 열어제꼈다. 온 세상의 풍경을 지워 버릴 기세로 퍼붓는 소나기가 바람결을 따라 빗물길을 만들었다. 카게히라는 눈두덩이를 때리는 비바람을 팔로 막아서고 밖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다시 몇 번이고 목이 터져라 아는 이름을 불렀지만 애석하게도 물기가 목소리를 지워 버린다. 비바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졌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지도 오래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때때로 시야를 막아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목이 쉬어 버린 걸 보면 모르긴 몰라도 오랜 시간 동안 이츠키를 찾았을 텐데, 비참하게도 이츠키의 이름을 입에 담을수록 자신이 버려졌다는 반증만이 유력해졌다. 

 

 나는 왜, 나는 왜 나라서, 나는 왜 항상…… 비실비실 올라갔던 입꼬리가 점차 쳐졌다. 이제 정말로 갈 곳이 없어졌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엉망으로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카게히라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떨어뜨린 고개 밑으로 질퍽거리는 바닥과 어울리지 않는 구두코가 보였다. 고개를 들자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카게히라를 무뚝뚝하게 응시하고 있는 이츠키가 눈에 들어왔다. 우비도 우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도 잔뜩 비에 젖어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츠키는 가볍게 목짓을 했다.

 

 

 “네 집으로 돌아가려거든 쭉 걸어.”

 “이츠키 씨…….”

 “데려다 주는 호의는 바라지도 말거라.”

 “그게 아니라, 내를 버리고 간 줄 알고…….”

 

 

 이츠키가 카게히라를 지나쳐 걷다 말고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깊게 내뱉는 한숨이 이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카게히라가 이츠키의 옷깃을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갈 곳이 있었다믄 여기 오지도 않았을 기다.”

 “…….”

 “이츠키 씨, 내도 인형이 되고 싶다.”

 “…….”

 “따라가도 되나…….”

 

 

 쉬어터진 목소리로 아주 작게 내뱉는 질문을 용케 알아들은 이츠키가 고개를 돌린다. 뒤이어 이츠키의 손이 카게히라의 턱을 쥐어 당겼다.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이 얼굴을 노골적으로 훑어보던 이츠키가 금방 카게히라를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어줍잖은 각오로 하는 말은 아닌 모양이군.”

 “…….”

 “얼마 버티지 못해 못 쓰게 된대도 내가 알 바 아니다.”

 “어, 어쩌다 죽어도 원망 안 하께.”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란 게야.”

 

 

 이츠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면서 먼저 걸음을 뗐다. 카게히라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였다. 신은 손을 뻗는 이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 이후 카게히라 미카는 이츠키 슈의 인형이 되었다. 그리고 이츠키 슈는 카게히라 미카의 종교이자 유일한 신이 된다.

 

 ……분명 그랬는데, 이건 인형이 아니라 수다쟁이 까마귀를 한 마리 입양한 것 같다. 배울 것이 산더미처럼 많다고 어느 순간부터 이츠키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카게히라가 최근 원하는 것이 있는지 사람 얼굴을 흘끔흘끔 훔쳐보는 것이 몇 주째, 드디어 오늘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서문이 아주 터무니없다.

 

 

 “스승님이 억수로 좋은 사람이라는 걸 내만 알고 있기 아깝데이.”

 “터무니없는 소릴. 멍청한 네 녀석이 내 말을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정말로 내를 시끄럽다고 생각했으믄 당장 내쫓았을 거 아니가?”

 “오냐, 지금이라도 맨발로 쫓겨나고 싶은 거라면 소원대로 해 주마.”

 “응아, 스승니임…….”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손을 얹어 언짢은 얼굴을 하고 앉은 이츠키의 의자 등받이 뒤로 카게히라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이츠키로서는 이제 이 저택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은 까닭에 마음이 편해진 것인지 슬슬 이츠키에게 간섭이란 것을 할 줄 알게 된 카게히라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가사를 맡기기에는 값비싼 은식기나 태피스트리를 다루는 법도 몰랐고, 어찌나 덜렁대는지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꼭 한 번을 못 참고 넘어지는 버릇이 있어 항상 심미안에 의해 완벽하게 관리돼야 하는 정원을 맡길 수도 없다. 단점을 나열하자면 사실 손가락과 발가락을 더해도 모자라다. 빗질을 몇 번이나 해 주어도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머리카락이라든지 시끄럽다고 주의를 주어도 쉴새없이 떠드는 수다스러운 천성이라든지 썩 꺼지라고 언성을 높여도 절대 눈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는 아둔한 충직함이라든지…… 이츠키는 배 위로 깍지를 낀 손을 올리고 턱을 들었다. 시선을 조금 옆으로 비키니 등받이를 두 손으로 짚고 이츠키를 쳐다보고 있던 눈동자와 시선이 교차한다. 처음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떨던 것이 또 저렇게 뭐가 좋다고 웃기 시작하는지 금방 헤프게 표정을 허무는 모양새가 마음에 안 들어 이츠키는 샐쭉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솔직하게 말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게냐.”

 “솔직하게 절대 아이다.”

 

 

 이럴 때만 즉답이군. 이츠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곳을 영영 떠난다면 몰라도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말하는 시건방진 인간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단 게야.”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기다. 만약 머리만 남는다 카면 머리만이라도, 뼈만 남아 버린다 카믄 뼈만이라도 돌아올 기다. 여기가 내 있을 곳이데이.”

 “누가 그런 흉측한 몰골로 돌아오는 것을 받아 준다더냐?”

 “내도 만약에라고 했다!”

 

 

 머리가 분리되면 한 시간도 채 살아남을 수 없는 하찮은 인간 주제에 나오는 말이 장황해 이츠키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것의 조그만 머리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너희 같은 인간들은 단지 심장이 멈추면 끝이 아니더냐? 생명활동이 종료된 이후의 미래가 무슨 소용이지? 방금 지은 웃음이 무슨 의미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카게히라는 진지하게 이츠키를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일장연설을 펼치고 있었다. 

 

 

 “스승님도 알지 모르겠지만 여기, 무서운 소문이 엄청 많이 나 있데이. 사람들이 스승님이랑 여길 싫어하는 이유는 잘 몰라서 그런 기다. 모르니까 무서운 기고, 무서우니까 싫어하는 거데이. 내가 스승님한테 처음 왔을 때처럼 다시 마을로 내려가서 오해를 풀믄 서로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한테 스승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설명해 줄 수 있다. ……내를 믿어 도.”

 “카게히라.”

 

 

 핏기가 가신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카게히라가 입을 다물었다. 이츠키의 시선이 어느새 카게히라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적막한 허공으로 향해 있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 또한 일찍이 그 곳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이제 와서는 벌써 몇 세기나 지나 버린 일이다만. 하지만 네 녀석이 나고 자란 마을은 생긴 지 한 세기도 되지 않았어. 이유를 알고 있나?”

 

 

 카게히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의 텀은 조금 더 길었다. 잠시 문장을 골라내던 이츠키가 일상적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그곳에서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츠키는 그 달밤을 기억한다. 소름끼치는 고요를 밟고 일어서자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증오스러워졌던 그 밤을 어떻게 잊겠는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세출의 천재, 건축과 미술에 두루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예술을 독파한 초인, 한때 이츠키의 존재는 예술의 화신이 내린 묵시로까지 여겨졌다. 처음 실과 천의 세계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전파해 주었던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나부끼는 것들에 유난히 향수를 느꼈으며 손 안으로 사르르 흩어지는 감촉을 총애했다. 동경하는 이의 육신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녀의 분신인 마드모아젤은 언제까지나 이츠키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 몇 개월을 공방에 처박혀 만들었던 인형에게서 기대 이상의 위로를 받게 되자 이츠키는 완벽한 인형을 제작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간혹 써내려갔던 악곡도, 가끔 이젤을 이고 나가 몇 시간이고 호수 너머의 종탑을 노려보던 일과도 전부 그만 두었다. 몇날 며칠 동안 밤을 새고 공방에 틀어박혀 고심했지만 쉬이 답은 나오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술로 은은하게 미소를 띈 마드모아젤이 무심코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어느 날, 이츠키는 계시를 얻은 것처럼 읊조렸다. 살아 있는 인형. 

 

 살아 있는 인형이라니, 그 얼마나 매혹적인 단어인지.

 그날 이후 이츠키의 관심은 육신을 떠난 영혼을 인형을 그릇 삼아 불러내는 행위로 옮겨갔다. 온갖 금지된 마도서를 불온한 경로로 수집해 읽고 행했다. 원체 타인과 교류가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달에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이츠키를 둘러싸고 의뭉스러운 소문들이 하나둘씩 곰팡이처럼 피어나기 시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츠키는 벽이며 바닥에 몇 번이고 반복해 그린 기하학적인 문양의 마법진들과 수십수백 개의 촛불들이 뿜어내는 향에 둘러싸인 채 모든 것들로부터 도피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부터, 탄생 직후 곧장 끝으로 사그러들기 시작하는 덧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츠키의 연구는 무서울 정도의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나이프로 괜한 뱃가죽을 꿰뚫린 실패작 인형들이 헛간 하나를 가득 채웠을 즈음 마드모아젤은 이츠키의 지시를 따라 비틀비틀 홀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그토록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기쁨을 일찍이 만나 본 적이 없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지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그녀의 영혼을 건져 올려 마드모아젤에게 담아낸다면, 야속할 만큼 꿈에서라도 단 한 번 얼굴을 비추지 않은 그녀와 조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은 짐승의 피를 뿌리고 나이프로 일정한 궤적을 따라 나선형의 좌표를 그려내는 일쯤은 몇 번이고 반복할 되풀이할 수 있으니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한편 공방 밖에서는 정체불명의 역병이 마을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온몸이 새카맣게 타들어간 채로 꺽꺽거리다가 며칠 버티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과 발이 꺼멓게 괴사해 마을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한 노숙인들이 마을 공터로 춤을 추며 몰려드는 일이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외부와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철저히 단절시킨 이츠키로서는 전혀 알 턱이 없는 일들이었다. 사람들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절망적인 역병에 절망했다. 늘어가는 사상자와 더불어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절망은 원망으로 커졌다. 원망은 표적으로 오래 전 스스로를 가둔 악마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를 지목했다. 모두가 그것을 타당하다고 여겼다.

 

 바야흐로 사람들은 이츠키가 금지된 서적들을 모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공방에서 수백 개를 달하는 인형들이 발견되었다는 목격담으로 가설은 점점 유력한 진실로 바뀌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거나 몸이 썩어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모든 재앙을 사주한 사악한 악마를 처단하고 목을 잘라 우리들의 신께 바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 신께 외면당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피가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공방을 둘러싼 횃불이 그를 연호하듯이 드센 기세로 타올랐다.

 

 이츠키는 외부의 문이 우악스러운 힘에 의해 타격당하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제 곧 고지가 눈앞이라는 기대감에 며칠 동안 잠을 설쳐 들은 소음이라기엔 너무나도 확실한 파괴음이었다. 아니, 아니다.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여력은 남아 있지 않다. 헛것과 환청에 빼앗길 정신이 있다니 배부른 소리다. 이츠키가 요근래 가장 애를 먹고 있는 이교도의 성전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동안의 해석이 맞다면 마지막 문장을 읽어내는 것으로 그녀와 재회할 수 있으리라. 램프의 불빛이 불안하게 물결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창문과 문을 단단히 봉해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이곳에서 박동처럼 움직이는 불꽃은 충분히 이질적이었다. 이츠키는 불러올 영혼 대신 제물로 바쳐질 마법진 위의 새가 혹시라도 살아 날갯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분노한 군중들과 어떤 경로로 마주치게 되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이상하게도 기억이 편린이 된 것처럼 잘게 나뉘어져 어렴풋이 되짚을 수 있을 뿐이다.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고막을 아프게 쪼았다, 벽이며 바닥에 어지럽게 그려진 마법진을 육안으로 목도한 사람들의 어지러운 탄식이 뒤섞여서, 타오르는 촛불들이 바닥에 넘어졌고, 몸 어디선가 날카로운 통증이 거미줄처럼 퍼지기 시작했고, 동시다발적으로 신체의 기능이 손상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드모아젤이 포악한 폭도들의 손에 팔과 다리와 몸통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훼손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츠키 슈는 생각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래서는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당혹감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 자리를 빠르게 채워나간 것은 걷잡을 수 없는 격노였다. 

 

 힘없이 바닥에 꺼진 시야 안으로 저 멀리 누군가의 발에 차여나간 작은 새가 보였다. 오래 전 삶을 끝내 차가워진 제물 대신 싱싱하고 뜨거운 피를 가진 제물을 바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이켜 보면 그건 귀가 아닌 머리에서 들리는 음성이었다. 이츠키는 양 관자놀이가 참을 수 없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숫산양의 뿔이 울컥 울컥 이츠키의 몸 안을 도는 피를 뽑아먹고 자라나는 생경한 감각에서 벗어날 즈음에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피비린내가 즐비한 가운데 망연자실하게 일어선 이츠키에게 마드모아젤이 생긋 웃음을 지었다. 역한 피비린내를 겨우내 참고 마드모아젤을 안은 채 공방 밖을 빠져나왔을 때는 참극의 유일한 목격자인 보름달만이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권능을 손에 쥔 이츠키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마을을 지도상에서 지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검게 탄 시체들을 순백의 나무로 바꾸어 스스로의 비석을 세웠다. 인간이 살았던 흔적을 모두 지워낸 자리를 들판과 숲으로 메운 이츠키는 마드모아젤과 함께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해서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방문했고 군락을 꾸리는 이주민들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나자 마을이라고 부를 만한 구색을 갖춘 사회가 갖추어진다. 인간에 대한 분노는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아졌지만 지금 와서 무슨 해명을 하자는 말인가. 이츠키가 생각에 잠겨 있느라 좀처럼 대답을 해 주지 않자 카게히라가 물어왔다.

 

 

 “응아? 스승님은 원래 인간이었던 기가?”

 “대답해 줄 용의는 없다.”

 “응…….”

 

 

 어떤 말을 해도 환대 받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카게히라가 그치만, 하고 운을 뗀다.

 

 

 “내는 그냥,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스승님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는 게 싫어서…….”

 “…….”

 “별말은 않고 스승님을 만나고 왔는데 많이 혼나지도 않았고 저주를 내리는 사람도 아니었다고 말해 줄 생각이었데이. 기분 나빴나?”

 

 

 이츠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채로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조금 결이 다른 의문을 담아 중얼거렸다.

 

 

 “네가 돌아갔을 때 정말로 환영받을 수 있을까.”

 “응?”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그, 그건…….”

 “그렇다면 막지 않으마.”

 “내는…… 응아?”

 “좋을대로 해.”

 

 

 비스듬한 조소를 띄운 이츠키가 용건은 이게 전부라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카게히라는 주춤 뒤로 물러나야 했다. 뒤이어 “돌아와서 보지.” 하는 말을 들은 다음에야 허락이 떨어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조금 전 이츠키를 감쌌던 위화감따위는 잊은 카게히라가 기쁘게 이츠키의 뒤를 따라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어엿하게 주인이 생긴 몸으로 동의를 얻고 옛집을 찾아가는 걸음이 경쾌하다. 이츠키는 아침이 되자마자 출발해도 좋다더니, 이번에는 카게히라에게 말 한 필을 내어 주기까지 했다. 카게히라는 그것이 처음 마드모아젤을 마을까지 데려왔던 말이라는 것을 알고 뛸 듯이 기뻐했다. 통 승마를 배워 본 경험이 없으니 말의 목덜미를 거의 안다시피 길을 내달리느라 스치는 풍경을 한 톨도 구경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볼 수 있었더라도 차마 눈 안에 다 담지는 못했을 것이다. 쭈뼛거리면서 숲을 헤맸던 카게히라와는 달리 길을 삽시간에 주파한 말 덕택에 시간이 무척이나 단축되었다. 카게히라는 이제 정말 마지막이 될 마을의 정경을 눈에 담으면서 앞으로 쏠린 상체를 천천히 올렸다. 

 

 이츠키에게는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마을 사람들을 다시 만나 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따로 있다. 아침저녁으로 이츠키의 시중을 들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마드모아젤과도 대화할 짬이 생기고는 하는데, 카게히라는 이 짧은 막간의 대화를 좋아했다. 인형인 마드모아젤은 카게히라보다 모든 분야에서 아는 것이 많았다. 특히 이츠키에 대한 것이라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츠키에 대한 것을 이츠키에게 묻는 것보다는 마드모아젤에게 묻는 편이 수 배는 더 빠를 정도였다. 그녀는 언젠가 어린 날의 이츠키를 달래며 자수를 짓고 레이스를 뜨는 법을 알려 주었던 상냥한 이의 반쪽짜리 영혼이 자신에게 깃들어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어째서 반쪽밖에 영혼이 깃들지 않았냐고 묻자, 그냥 웃기만 했다.

 

 스승님은 마드 누나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데, 와 새 인형을 찾으러 온 거가? 내한테는 잘된 일이었지만, 혼자 내려오느라 무섭진 않았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침대에 턱을 괸 카게히라가 마드모아젤에게 물은 적이 있다. 마드모아젤은 푹신한 침대위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걸어 카게히라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슈 군은 몹시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들의 인형사인 슈 군을 정말 좋아해. 그러니 홀로 외롭게 둘 수 없었어. 미카 쨩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러니 언제까지나 슈 군의 곁에 있어 줘.

 응. 

 약속이야.

 약속이데이.

 

 ㅡ그러니 돌아가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누구를 만나면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할까. 우선은 스승님에 대한 소문은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말해 주고, 저주 같은 것은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였다는 말도 해야 한다. 스승님은 당신들의 이유 없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흉악한 악마가 아니라고. 원한다면 아름다운 것들이 잔뜩 모인 천국을 열 수도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면 사람들도 모든 오해를 풀고 스승님을 칭송할 것이다. 아무도 함부로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고삐를 쥐면서 완전히 상체를 세운 카게히라가 마을 입구로 말을 몰았다. 낟알을 걷는 사람들의 무리가 정겨워 보였다. 카게히라는 말의 머리며 갈기를 찬찬히 쓰다듬으면서 한창 추수가 진행 중인 들판으로 향했다. 쇠말굽이 바닥을 박차고 걷는 소리에 두어 명이 카게히라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금의환향이라도 한 기분이 들어 머쓱하게 웃음을 지으려는데, 누군가가 쟁기를 들어 날카로운 쪽을 여기로 들이밀었다. 카게히라와도 족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돌아온 거야! 그대로 줄행랑이라도 친 줄 알았더니?”

 “저, 저택에 다녀오는 길이니 진정하이소. 아가 놀라예……!”

 “그러니까 무슨 저주를 가져다 옮기려고 작정해서 여기 발을 들이느냔 말이다! 이 은혜도 모르는 놈!”

 

 

 당황한 얼굴로 말을 물리던 카게히라가 저주라는 단어에 기운을 차린 듯 표정을 풀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아직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로 자신이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고 말해 주면 끝날 일이다.

 

 

 “내는 또. 저주라는 건 애초부터 없었데이? 스승님은 나쁜 악마가 아니라가 저주 같은 주술은 부리지도 않는다 캤다.”

 “뭐?”

 “그러니께. 인형을 가져다 줬는데 얼마 화내지도 않았구, 아무래도 이상한 소문이 잘못 퍼진 걸 기다.”

 

 

 환하게 웃는 카게히라의 앞에서 사람들이 저마다의 눈빛을 교환했다. 오고가는 시선이 카게히라를 새로이 규정하기 시작한다. 카게히라는 해명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좀처럼 풀리지 않는 분위기에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로 돌아 달아나려는 때에 마을 청년 하나가 말의 이동경로 앞으로 농기구를 들이밀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 말이 놀란 채로 벌떡 일어나 달아났지만 카게히라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상태로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카게히라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가슴팍을 차내는 발길에 다시 균형을 잃고 무너지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가!”

 “카게히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비아냥거리는 음성이 이죽거리며 물어왔다. 카게히라는 어느 틈엔가 모인 사람들의 무리 안에서 제 어미의 옷깃을 쥐고 있는 소우를 보았다. 소우는 카게히라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어깨를 움츠리더니 그대로 어미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스승님의 말이 맞았다. 떼를 써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카게히라는 소우를 자신의 품으로 서둘러 숨기는 그의 어미에게서 왜 돌아왔냐고 탓하는 질책을 읽었다. 

 

 

 “언제부터 그 악마 놈을 스승님으로 모시게 된 거냐!”

 “…….”

 “아니, 처음부터 그 악마 놈이랑 내통한 건가? 응? 처음부터 그 떠돌이 도둑고양이들이 흘리고 간 새끼라고 위해 줬더니만. 바른 대로 말하지 못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구나. 거리를 좁히는 살기에 끝을 직감한 카게히라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카게히라가 정신을 잃기 직전 쯧,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

 

 

 

 카게히라가 혼곤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창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것도 같은 그리운 풍경이었다. 부드럽게 몸을 감싸고 있는 침구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아 답지 않게 늦장을 부리고 있는 동안 절도 있는 걸음 소리가 침대 옆을 매끄럽게 스쳐지나간다. 기억이 불투명하게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발소리에 아직 수마에 붙잡힌 정신을 수렁에서 끌어올린 카게히라가 이불을 쥔 손을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늘하고 스산한 냉기가 카게히라의 손을 잠깐 훔친다. 이제 이츠키의 화법을 제법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카게히라는 이 손짓이 단호하고 부드러운 만류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계속해서 밀려드는 잠 때문에 고개를 가누는 게 고작인 지금은 외려 그것이 고마웠다. 주인이 지시한다면 따르는 것은 충직한 인형의 사명, 카게히라가 손에 힘을 빼고 고개를 돌려 어느 샌가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는 이츠키의 뒷모습을 본다. 이제 창문 밖의 풍경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너무 늦었다고 혼날 줄 알았는디,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해가 중천에 떴다고?”

 

 

 부드럽고 깊은 저음이 찌르듯이 틈을 주지 않고 물어왔다. 하지만 질답이 목적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어딘가 필요 이상으로 의기양양한 기운을 차린 음성이 뒷문장을 바로 이어간다.

 

 

 “지금은 새벽 열두 시라는 거다.”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번지는 목소리에 카게히라가 그런가, 하고 눈을 다시 감았다. 역시 나쁜 꿈이었구나. 씁쓸한 안도감이 긴장을 풀게 만든다.

 

 

 “그럼 조금만 더 자도 되겠나?”

 “이제는 게으름까지 피우는 게냐.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 머릿속을 열어서 성기게 맞물린 톱니바퀴를 제대로 조율하고 싶다는 게야. 하지만 오늘만큼은 허락해 주마.”

 “게으름이 아니라 자꾸 잠이 와가 견딜 수가 없데이. 미안타, 얹혀 사는 주제에.”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했잖아?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천박한 버릇이 과거에 있었다고 한들 이곳에서는 모두 허물일 뿐이다. 추한 태도는 용납하지 않아.”

 

 

 완전히 졸음에 잠식당하고 만 모양인지 대답 대신 카게히라의 숨소리가 일정한 운율로 방 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이츠키는 팔짱을 끼고 저 멀리서 일렁이는 화마가 이 땅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아이들이 깨어 있기에는 더욱이 늦은 시간이다. 그러니 ‘착한’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는 편이 좋겠지. 잠든 아이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마저 평화로울 것이다. 돼지처럼 꽥꽥대는 시끄러운 비명소리가 곤히 잠든 아이들의 잠을 깨울 수 없도록 마을의 소리를 집어삼킨 보람이 있었다. 타들어가는 집에 몸이 깔린 닭과 몸에 불이 붙은 채로 뛰어다니는 개와 망연자실하게 바닥에 주저앉는 쥐들, 지금 이 시간만큼은 어디에도 눈을 뜨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가을의 건조한 대기는 공기 중의 수분을 바싹 말려 마을 전체를 더할나위 없이 좋은 불쏘시개로 만들어 주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본인도 아이랍시고 눈을 감고 잠든 불출한 인형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의 축제를 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저 실패작이 더럽고 추악한 것들만 보고 겪으며 살아 오느라 묻은 오염을 세척하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수없이 접하게 하면 된다.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뒹군 탓에 때가 묻은 인형이지만 오랜 시간 공을 들인다면 썩 마음에 드는 물건으로 탈바꿈시킬 수는 있다. 방금의 축제는 전초전이었다. 사실상 무대의 리허설까지 관객이 숙지해야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더욱이 이 무대의 출연진들은 너무나 저속하기 짝이 없다. 아쉬운 완성도의 무대였다. 불꽃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는 저 품위 없는 몸짓을 보라. 날개도 없이 파닥거리느라 애쓰는군. 아비규환으로 물든 화염지옥을 잠시간 구경하던 이츠키가 느긋하게 몸을 돌렸다. 커튼을 지탱하고 있던 매듭이 스르르 풀려 인형의 뺨을 불그스름하게 밝히던 가짜 태양을 완전히 암흑으로 묻어 버렸다. 몇 세기 동안을 추악한 욕망의 연쇄고리를 피해 살아남은 이 저택에서 시간은 무한했다. 인형의 시간은 잡아 묶어 고정하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순진하게도 자신과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이츠키는 생명의 증거라고는 규칙적으로 내뱉는 호흡뿐인 카게히라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칠흑에 파묻힌 괘종시계가 고작 새벽 한 시를 일렀다. 그림자가 가장 짙게 겹쳐지는, 아이들이 깊게 잠들기 적당한 시간이다. 쫓겨 일어날 필요 없이 더 달콤한 꿈을 원없이 꿔도 좋았다. 혓바닥에 닿는 순간 감미롭게 녹는 설탕 같은 꿈을. 

 

 여기, 하얗게 멍든 달이 낮을 잊은 굴뚝새의 유리집에서.

 

 


 

 

 

Thanks to 박리리님, 지도님, 국수님, 듀콩님, 말차님, 에리카님, 유리님! 진행이 막히거나 원하는 문장이 나오지 않아 애먹을 때마다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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