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엘 도르프만 作, ‘연옥’의 세계관을 차용했습니다.
* 과거 날조, 성관계 묘사, 죽음 소재.
* 심하게 암울하고 갑갑하며 어둡습니다.
P.
비에 젖은 채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머리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댔지만 몸뚱이는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다. 새파란 입술이 달달 떨리고 폐와 내장은 과열 되어 찢어질 것 같다. 급한 걸음에 발목을 삔 것도 여러 번이다. 운동화 한쪽은 언제 벗겨진 건지 흰 양말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찰박, 텁, 찰박, 텁……. 카게히라는 거의 기다시피 손톱을 꺾어가며 난간이고 계단 턱을 짚었다. 몇 층을 올라온 건지, 앞으로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가장 끝에 닿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숨이 턱까지 올라오다 모가지에서 막혀 시야가 점점 뿌옇게 변했다. 흔들리고, 흔들린다. 나머지 신발 한쪽이 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보다 더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정신은 문득 의아해했다. 여긴 어디고, 어딜 오르고 있고, 왜 오르고 있는지. 가려 하는 곳엔 뭐가 있지? 이대로 멈춰버린다면 편해질 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단 침을 흘리며 눈물을 연신 삼키고 있는 입은 소리 없이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노력을 배신하는 세상은 어두울 뿐이라고, 그가 그랬으니까. 눈이 넘어갈 것처럼 빙빙 돌았다. 그렇게 넘어지기 직전에야 쇠로 된 문고리를 붙들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그걸 돌리고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온통 젖은 세상이 눅눅하다.
그런 중에도 빛나는 그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그 사람.
“슈!”
먹구름이 한가득 담긴 물웅덩이가 흩어진다. 잠깐 멈춘 사이에 한계에 다다른 육체를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다리가 꼬여 넘어져버렸으나.
이츠키는 그런 카게히라를 일으켜주지 않았다. 그저 높은 곳에서 쳐다보고 있었을 뿐. 그러나 그 눈만은 세상 어느 곳에 버려진 아이보다도 더 처참해 카게히라는 제가 그를 올려다보는 줄도 몰랐다. 빗방울이 그의 머리카락 끝에 뭉쳤다 떨어져 카게히라의 눈 속으로 빠졌다.
깜빡. 그 사이 이츠키가 코앞에 존재를 드리웠다. 내뻗은 손에 들린 총구가 그 흐린 빗속에서 선명하다. 그러나 발발 떨리는 팔은 그것을 치우지도 못하고 바닥에 겨우 붙어만 있는 신세다. 숨으로 꿀렁거리는 카게히라의 목을 이츠키가 시린 시선으로 어루만졌다.
“카게히라, 너는 나를 지옥까지 쫓아오겠다고 했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런 말이 아니다. 이츠키의 손이 조금 분주하게 흔들렸다. 카게히라가 좀 더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상체를 일으켜 그를 향하려 했으나 차가운 총 주둥이에 닿아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찬 것도 맞닿으면 따뜻한 것을, 그는 아직 모르는 걸까? 겁에 질려 눈을 감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그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카게히라가 하는 일이라곤 뭐든 엉망일 뿐이다. 여전히 자유로운 이츠키의 엄지가 총의 몸뚱이를 타고 올라가 우아하게 관절을 꺾었다. 딱 맞은 자리에 들어차는 것 같은 쇠붙이의 소리가 낯설다.
“하지만 증오스러운 넌 그럴 필요 없단 게야.”
흐느끼며 이츠키를 향해 눈을 떴다. 저의 세상 전부는 그라는 걸, 정말 그는 모르는 걸까? 모든 것은 잠시 후면 끝날 것이다. 잠긴 목소리로 응, 응, 하는 대답을 겨우 끄집어내고 이마 바로 앞에서 떨리는 그의 손짓에 집중했다. 몇 번까지 셀 수 있을까.
하나, 둘, 셋… …넷.
탕.
1.
철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다 눈을 떴다. 제법 오래 누워있었는지 잠시 들어 올린 머리로 책상의 열기가 전해졌다. 원래 제게서 뺏어간 열일 것이다. 상체를 들어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깜빡거리는 흰 조명을 올려다보았다. 이 어두운 중에 밝은 건 저것 밖에 없건만, 벌레 하나 죽은 모양이 없다. 취조실인가, 이츠키가 눈을 찌푸렸다 흐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어두운 잿빛의 벽뿐이다.
발걸음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 한쪽에 난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지나갈지, 들어올 진 몰랐으나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곧 녹슨 철제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너머로 들어온 작은 체구의 남자는 악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고개를 까딱 움직여 인사를 전하고 맞은편에 앉아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적의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눈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츠키 씨, 안녕.”
“…….”
마치 자신을 오래 알아온 것 같은 인사지만, 이츠키는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츠키 씨 담당이다.”
“무슨, 담당…?”
남자는 대답 없이 웃는 얼굴을 유지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무언가 할 말을 준비했던 것 같은데, 막상 닥치니 생각이 나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침을 몇 번 소리 나게 삼키다 별거 아니란 듯 활짝 웃는 얼굴이 다시 저를 향했다. 참 희고 예쁜 얼굴이라고 이츠키가 속으로 여겼다. 피곤한 안색만 아니라면 제법 쓸 만했을 것이다.
“기억나는 거부터 해보자.”
그는 함께 들고 온 가방에서 총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이 그걸 가져갈 지도 모른다는 걸 신경 쓰지 않는 듯 정확히 한 가운데에. 물론 이츠키는 그걸 가져갈 생각이 없다. 당장 어디 쓸 곳도 없고, 쓸 일이 있다 해도 총알이 없을 것이란 게 그의 예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총을 힐끔 내려다보다 다시 남자를 향해 턱을 들어 올렸다.
“내 조부님의 것이다.”
“…맞다. 사용한 적이 있는가 말해보래이.”
“있지.”
이츠키는 처음 사립학교 교복을 입었을 때를 떠올렸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갑갑한 옷 속에 갇힌 제 모습을 보고 있던 그 때. 뒤에서 유모가 매주는 넥타이를 거절한 채 방을 나섰다. 형이니 누나가 퍽 귀엽다고 비웃음을 날렸다. 조부를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굵직한 모양의 노인네가 표정 변화 없이 저를 보곤 눈썹을 까딱였다. 그리 나쁜 꼴은 아니란 뜻이다. 속을 쓸어내린 이츠키에게 외출 준비를 하라고 했다. 형과 누나는 금방 각자 방에 들어가 숨을 죽였다. 유모가 우두커니 서있는 저를 얼른 도로 데려와 옷장에서 다른 옷을 내어왔다.
차를 타고 아주 먼 곳으로 향했다. 조부는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입 꼬리가 종종 들리고 있었다. 이츠키는 그런 조부를 볼 때마다 불안감이 들었으나 무슨 일이 있어봐야 여태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넘어갈 상황이겠거니 하며 속을 편하게 먹었다. 종아리를 거의 다 덮는 부츠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별개의 감정이다.
도시를 빠져나가 점점 시골로 향하며 차는 크게 덜컹거렸다. 오랜 시간을 들여 가라앉힌 마음도 그에 동화되어 쿵, 쿵 들썩였다. 겨우 뜨문뜨문 난 민가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되자 조부는 차를 세우게 하고 트렁크를 열었다. 벌레가 득실거릴 것만 같아 이츠키는 조부의 독촉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다 껄끄러운 표정을 하고 풀밭에 발을 내렸다. 유모가 부츠를 신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부는 큰 가방을 직접 매고 이츠키와 둘이 산을 올랐다. 이런 곳을 오는 취미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이츠키가 입을 꾹 다문 채 조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혼자 길이라도 잃었다간 골치 아파질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부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이츠키도 덩달아 상체를 굽히고 조부의 시선이 가는 곳을 따라 열심히 고개를 움직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곧 풀숲 사이로 움직이는 갈색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울타리 없이 동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이츠키가 입을 열려 하자 조부가 먼저 검지를 들어 입단속을 시켰다.
그것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삭바삭하는 산 바닥의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조부는 그 소리에 묻히도록 조심조심 가방을 열어 긴 사냥용 총을 꺼내 들었다. 이츠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몸을 더 굽혀 나뭇잎 뒤로 눈을 숨겼다. 그리곤 다른 생각을 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왜 조부가 이런 곳까지 저를 데리고 온 것인지가 더 궁금해져 머릿속은 점차 복잡해져만 갔다.
때는 정해진 것처럼 오지 않았다. 사념의 허리를 자르고 조부의 총이 크게 울부짖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조부는 쾌재를 터트리며 이츠키의 팔을 잡아 자신이 방금 맞춘 그 짐승에게로 다가갔다.
꼴딱, 꼴딱, 모가지 아래가 아직도 꿀렁거리는 탐스러운 그 짐승의 정체는 사슴이었다. 이츠키는 그것이 퍽 가여웠다. 저 아름다운 털이 피로 물들어 윤기를 잃게 된다니. 인형처럼 반짝이는 눈도 빛을 잃고 더 이상 세상을 배회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측은히 제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손자의 손에 총을 쥐여 준 그 늙은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숨통을 끊어라.
손수 장전까지 해준 채 조준하도록 팔을 꽉 붙들더라. 이츠키는 그 팔을 뿌리치고 뛰어 내려가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제게 그럴 힘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눈물 고인 까만 눈이 체념한 듯 단조롭게 물들어 갔다. 가엾게도 이대론 고통 속에서 버둥거릴 수밖에 없다.
쏴.
조부의 말과 동시에 이츠키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래서 우예 됐는데?”
“조부님이 사람을 시켜 집에 가져가게 했지. 목을 잘라 박제해 서재에 장식하셨다.”
“사슴말고. 이츠키 씨 말이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이츠키가 한숨 뒤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취조실. 괜히 거짓말을 하거나 대답을 회피해 일을 만들어 봤자 좋을 게 없다.
“집에 돌아가 토했다. 삼일 간 죽도 못 삼켰지. 조부의 서재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들어간 적 없고. …물론 그 후에라도 자주 간 것은 아니었다만.”
“그래 싫어할 거를 와 그랬노?”
“…….”
왜? 이유를 묻는 건가? 그 어린 나이에 거스를 수 있는 게 얼마 없다는 걸 알고서도?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이츠키를 향해 남자가 총을 더 내밀어 그쪽으로 보냈다. 이츠키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그것을 집어 들지 않고 있다.
“후회하나? 그때로 돌아가믄 다른 선택을 할 거가?”
“……그 때의 나라면 어쩔 수 없이 같은 수순을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쏘지 않겠지. 조부님이 그 어떤 것도 맞출 수 없게 했을 테니.”
남자는 만족도, 불만족도 내비치지 않은 채 제 호주머니에서 총알 네 개를 꺼내 총의 옆에 내려두었다. 이츠키의 예상대로 총에는 총알이 없었다.
“그 총알이 거기 들어가는 기 맞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군.”
“방금 이츠키 씨가 안 쏜다구 했다 아이가.”
“기록도 하지 않은 말을 믿는단 거냐?”
이츠키는 총을 들어 원형의 탄창에 난 구멍으로 총알을 하나씩 밀어 넣었다. 책상에 있는 것들을 모두 집어넣고서도 구멍 두 개가 남아있다. 그 구멍 틈으로 때 하나 없는 책상을 흘겨보고 탄창을 밀어 넣은 채 총을 제자리에 두었다. 그리곤 남자의 쪽으로 총을 보내버렸다.
“기록도 하지 않은 말을 지키네.”
“흥. 어디선가 녹화라도 하고 있겠지. 본론으로 들어가라.”
남자는 총을 집어넣지 않았다. 그저 그게 희멀건 빛에 빛나는 것을 보다 제 양 손을 그 위에 올려두고 포개 잡았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손톱이 손끝에 비실비실 달려 있다. 이츠키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잡고 가는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약간 건조하고 차가운 그 감촉이 익숙하면서도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소름 돋았다.
“쓰레기장.”
“…….”
“쓰레기장 얘기를 해보자.”
떨어지려는 이츠키의 손을 남자가 급하게 붙들었다. 약하고 덧없는 손길이다. 어느 새 넋을 놓고 응시하고 있던 손에서 눈을 떼고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국적으로 빛나는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거기서 주웠제?”
“나는 쓰레기 같은 걸 수집하는 취미 따윈 없다. 그 애라면 모를까.”
“그 애에 대해서 얘기하자는 거래이. 처음 그 애를 어디서 데려왔노?”
“내가 데려온 게 아니다. 그것이 나를 멋대로 따른 것이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어딘가 속상한 것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아이다. 잘 생각해봐라. 첫마디부터 천천히.”
“…….”
“당신은 그 날 쓰레기장에 갔제?”
이츠키는 구역질나는 냄새가 어디선가 스며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무얼 조각내는지 모를 기계의 소음이 뒤를 이어 귓가를 쑤셔댔다. 그 날 쓰레기장에 간 것은 아주 소중한 것을 찾으러 간 것이었다. 그 넓은 곳에… 그런 높은 이상을 갖고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짐승인가 하여 고개를 돌린 곳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고 무슨 생각을 했노?”
“더럽다.”
“그리고?”
“아름답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너, 이리 와봐라.
그러나 그 애는 도리어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쓰레기 더미 뒤로 작은 몸을 숨겼다. 부산스럽게 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제멋대로 튀어나오고 엉켜 엉망이었으나 그 아래 난 눈만은 유리구슬처럼 맑고 깨끗해 이츠키로 하여금 직접 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슬쩍 고개만 내밀고 있던 아이가 그 걸음을 알아채고 아예 머리끝까지 쑥 숨어 들어갔다.
쓰레기를 파고 들어가 그 작은 틈에 몸을 비집어 넣고 그 앞에 선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더란다. 도저히 더 안으로는 들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이츠키를 둔 채 아이가 뒤로 빠져나가 내달렸다. 그는 뛰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물건은 그 자리에 있어 나중에 찾아도 될 것이었지만 저것은 지금 놓치면 영영 손에 쥘 수 없을 테니.
구부러진 길 이리저리로 아이가 뛰어 간다. 누구도 닦을 의지가 없는 벽엔 하찮게 예술이라고 부르며 뿌린 스프레이 낙서들로 가득하다. 이 대낮에도 술주정뱅이의 다리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거리에 두 발걸음이 누가 질까 서둘렀다. 그 좁다란 곳을 지나 더러운 하천을 낀 큰 길엔 열려있는 가게가 없다. 밟혀 더러워진 종이엔 거의 알몸을 한 여자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촌스러운 분홍색의 하트도 여기저기, 전화번호도 여기저기.
그것에 정신이 팔리다 퍽,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아이가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렸는지 넘어져 있다. 벌떡, 고개를 들고 일어나 한참 가만히 있는 아이에게 달려가 일으켜 세워주고 직접 옷의 먼지를 털었다. 그 사이에도 도망갈까 팔을 꼭 잡고서. 그는 놓으라는 말 하나 안 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어두운 눈을 굴려 자신을 노려보았다.
이츠키는 괜찮다, 괜찮다, 하며 손을 뻗어 그것의 머리를 쓰담았다.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러나 그는 코를 막는 대신 숨을 잠깐 멈췄다가 아이의 손을 더 꽉 잡고 저를 따라 걷게 했다. 반은 끌고 간 거나 다름없었다.
가는 동안 몇 번인가 손등을 긁혔다. 귀찮게 버티고 서려는 바람에 엄한 얼굴을 하며 부러 인상을 찡그리고 험한 말을 뱉어야 했고. 아이는 결국 이츠키의 별장에 다다라서 눈물을 터트렸단다. 응, 응아, 으으응, 그런 소리나 뱉어내던 작은 입이 겨우 열리며 아프다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츠키는 얼른 제가 꽉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다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그 안에 든 동그란 사탕 하나, 아침에 누이가 쥐어주었던 것을 넣어뒀었나.
반짝이는 비닐 포장지를 찢어 그 안에 든 것을 흐느끼는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자판기에 동전이라도 넣는 기분이었다. 단내가 바깥으로 풍기기 전에 아이가 얼른 입을 닫고 코를 훌쩍거렸다. 눈가엔 아직도 눈물이 어른거렸으나 일단 당장은 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의사 정돈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그 애를 만났다. 욕실에 밀어 넣어 깨끗이 씻게 하고 다듬진 못했어도 수없이 빗질해 겨우 어깨라인을 따라 흐르는 머릿결을 만들어 냈다. 마침 만들어두었던 옷 중에 적당히 맞을 것 같은 것도 그 애의 손에 들려주고 이츠키는 흡족해했다. 아름다운 것을 가꾸어 만들어내는 건 언제나 보람찬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애와는 관련 없다.”
“그 애가 누꼬?”
“머리 빈 까마귀. 실패작. 조악품. 무능한 인형…….”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쓸쓸한 맛이 묻어나는 웃음 뒤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츠키는 이 지루한 취조가 얼마나 더 계속될지 의아하던 차에 일그러지는 하얀 얼굴을 발견했다. 저런 표정은 어울리지 않아, 그와. 그렇게 인상으로 향하는 기다란 손을 남자가 붙잡았다.
“하모, 그렇제. 하모, 그렇게 가치도 없었제. 새 중에선 까마귀가 제일 머리가 좋대두 그 아 뇌는 녹아 사라진지 오래였데이. 최고의 인형사가 수리를 해도 고쳐지지가 않았고. 무능? 무능이라믄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 아는 구제불능 쓰레기였데이.”
“…잠깐.”
“쓰레기를 수집하는 취미가 없다고 했제? 그라믄 당신 인생에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주운 쓰레기가 그 아다.”
“잠깐이라고…!!”
이츠키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려다 휘청거렸다. 겨우 탁자 가장자리를 붙들어 균형을 맞췄지만 좋은 꼴은 못되었다. 선명했던 시야가 옆으로 위로, 흩어져 번졌다. 아찔한 눈앞에서 남자가 일어나 천천히 제 뒤로 향했다. 그리고 넘어졌던 의자를 일으켜 원래 자리에 밀어 넣곤 저를 그 자리에 도로 앉혀두었다. 눈물이 나도록 낯익은 손짓에 이츠키가 멍청하니 앉아 희멀건 빛 아래를 응시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당신은 그 아를 당신의 인형이라고 했다.”
“…….”
“당신의 뒤를 이어 제왕… 이 될 거라고 했다.”
“…….”
“하지만 전부 가치 없는 일이었제.”
“…아니다.”
초라해진 안색으로 흔들린 눈을 붙들지 못한 채 이츠키가 중얼거렸다. 남자의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찌르는 것 같았다. 제가 아닌, 그 스스로를. 어떻게 그토록 자학적인 연기를 해낼 수 있는지 이츠키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탁자 위에서 움켜잡은 주먹은 그보다 더 심하게 떨려왔다.
“카게히라는… 나의 카게히라는…….”
“후회하제?”
“뭘.”
“그 아를 데려온 걸.”
남자가 주머니에서 빈 탄피 하나를 꺼내 책상의 한 가운데에 두었다. 온전치 못하고 공허하게 일그러져 있는 그 탄피에 시선이 맞았다.
탕. 한 발의 총성이 머리에 와 꽂혔다.
2.
이츠키는 정신없이 퍼져있는 프린트들을 내려두고 테이블에 엎어져 불편하게 자고 있는 카게히라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조용하게 감긴 눈이 곤히도 자고 있는지 견고하다.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대충 훔쳐낸 뒤 어깨에 들쳐 메고 침대로 향했다. 조심조심 내려두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아 한결 편해진 흰 얼굴을 가만 보았다.
이리 보아도 예쁘고, 저리 보아도 예쁘고. 잠자고 있을 때엔 얼마나 천사처럼 아름다운지. 저도 모르게 비죽 튀어나오는 웃음을 물고 그 뺨에 입을 맞췄다.
하물며 눈을 떠도 예쁠 것이다. 가벼운 입을 놀려도 사랑스러울 것이다. 여전히 자수 하나 제대로 넣질 못해도, 언제나 기대하라던 성적이 아무리 밑바닥이어도. 그래도 이츠키는 카게히라를 사랑할 것이었다. 그렇게 하자고 약속했다.
좋아하니까, 좋아해달라고 했다. 좋아하니까, 앞으론 사랑하자고 했다. 이츠키가 학교를 떠나는 마지막 날 그렇게 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러자고, 나지막하게 속삭여줬다. 그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반지를 꺼내 빨갛게 언 손가락에 끼우는 대신 손바닥 안에 넣어주었다. 카게히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았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라고 했다. 앞으로도 계속. 눈물이 식은 뺨이 더 발갛게 달아올랐다.
카게히라는 아둔하다면 아둔한 이였지만 향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상당히 뛰어난 추진력을 보였다. 자신은 빛이 되지 못할 거라 믿는 것이 빛을 향하기 가장 좋은 조건인 것이다. 그는 동경과 사랑을 구분해내지 못한다. 충분히 동경하는 예술가의 세상에 발을 들이고도 충족되지 못한 사랑을 찾아 그 애는 다 버리고 자신의 뒤를 쫓아왔다.
기특하다고 할 만큼 좋은 빌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회화만 겨우 익혀 무작정 짐을 싸 날아온 카게히라는 당분간 어학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라며 통장을 내밀었다. 자신의 예술에 아낌없이 투자해도 모자랐을 텐데 아마 제법 무리해서 지냈을 것이다. 부득불 멘션을 구해 지낼 것이라던 아이를 제 집에 들여 지내게 했다. 여기까지 온 주제에 아닌 척 시치미 떼고 멀리 가려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레포트를 쓰던 랩탑을 덮고 한참 그 앞에 서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인이 되어 하는 동거란 묘한 분위기를 품기 마련이었지만 카게히라는 여전히 융통성 없이 금전적으로 기대려 하지 않았고, 저도 저 나름대로 결과물에 타협하지 않아 피곤한 얼굴만 가득 내세우고 지낸 터였다.
…
…농, 카게히라. 깨었으면 말이라도 해라. 이 음침한 녀석.
스르륵 열리는 눈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것. 잘못 끼워 넣었으면 어떠랴. 예술은 우발적 사고와 밀접하다. 미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우라노스가 그의 아들에게 거세당한 살점으로부터 탄생하지 않았나. 이 또한 필시 새하얗고 보드라운 비단 위에 여신이 가지고 놀다 굴려둔 돌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뺨에 손을 올리고 이마를 맞댄 채 그 눈을 마주하고 있자 카게히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빛을 굴린다.
이제 스승님이란 칭호는 그만두라고 했는데도, 네 멍청한 머리는 받아들이는 게 느리단 게야. 카게히라, 언제쯤 내 곁으로 와 서줄 생각인 거지? 그 전까진 반지를 끼게 허락하지 않겠다.
…
흥. 나쁠 것 없지. 이 내게 그런 것이 어려울 거라 생각한 거냐?
이츠키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이 카게히라의 뺨을 스쳐 내려간다. 여러 번의 사포질을 거친 자신의 조각상을 어루만지듯이, 혹은 실밥을 털어낸 뒤 마지막으로 표면의 보풀을 확인하듯이. 인간이 되라고 했으면서 그에게 여전히 카게히라는 아름다움이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 생에 가장 최고로 여기는.
…미카.
미카.
나의 미카.
사람은 사랑을 해. 어린 시절의 우리가 사랑의 시행착오를 겪었다면 이제는 그러지 말자. 그러지 말고, 우리 사랑을 하자. 사랑하니까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해 달라 애원하고.
인간의 손이 맞닿고, 인간의 입술이 부딪힌다. 날카롭게 카게히라를 제 앞에 고정시키는 이츠키는 달콤하고 그윽한 몸짓과는 다르게 타오르는 내면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문 앞에서 기다리듯이 정중히 노크하고, 차임벨을 누를 뿐. 카게히라가 맞이하지 않겠다면 그대로 돌아가 버릴 테지만 이츠키는 여전히 자신감이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타이밍이라는 제왕의 습관 같은 것.
그 날은 정말 말 그대로 여유로운 한 때였다. 급한 과제도 없었고, 카게히라는 온전히 쉬는 날이었다. 점심식사를 한 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적당히 따뜻했지만 방 안은 조금 차가웠다. 아마 겨우내 뒹굴었던 러그를 빨기 위해 내놓은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카게히라는 오후의 햇살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그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츠키의 얼굴엔 파란 그늘이 졌다. 닫힌 창문 너머에서 앞차를 탓하는 클랙슨이 두어 번 울리고 누군가는 알지 못할 소리를 질렀다.
이츠키는 곧 세상에서 멀어졌다. 카게히라의 고된 손이 제 뒷머리를 헤치고 들어와 목을 움켰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할 것도 없이 느슨하게 풀어진 눈길이 야시시하게 흩어졌다. 이츠키는 다시 고개를 내려 그에게 키스하기로 한다. 숨소리 중간 중간 교활하게도 슈, 슈우, 하고 부른다. 그게 허스키한 호흡과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걸 안다면 제법 영악한 짓을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카게히라에게 흘러 들어간다. 호흡이, 손길이, 눈빛이, 혹은 또 어떤 살결이. 부드러운 섬유로 된 옷을 올리고 정신없이 마른 몸체를 훑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이츠키는 부끄러움보다 흥미가 앞섰다. 노력과 연습은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었지. 잘게 잘 붙은 근육 사이에 숨어 조금 뒤틀어진 골반 뼈를 꾸욱 누르며 웃음을 숨기고 엄한 얼굴을 들었다.
카게히라, 춤을 연습한 뒤엔 꼭 스트레칭을 하라고 했다. 뼈가 뒤틀리면 장기적으로 몸에 좋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거늘.
…
정말 비키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나는 무뢰한 따위가 아니니. 특히나 사랑하는 너에겐 원하지 않는 그 무엇도 강요할 생각이 없다.
그러자 입을 꾹 다무는 사랑스러운 이여. 이츠키는 곧 다시 입술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허리를 꽉 눌러 잡았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반항 없이 혹여 도망갈까 자신을 더 강하게 안는 팔이 더없이 따뜻했다. 마치 그대로 영원할 것처럼.
자잘한 근육 사이사이를 입술로 스치고 지나가면 목 어딘가를 긁어 나오는 매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노래를 부를 때보다 더 강하게 안을 파고드는 그 숨결에 이츠키는 몇 번이나 속을 다잡았다. 그렇지 않는다면 단번에 그를 움켜잡아 제멋대로 흔들어버릴 것만 같아서. 다시 그런 실수는 없다.
하지만 초조한 까마귀가 조심성 없이 먼저 다리를 벌려냈을 땐, 이츠키도 더 그를 애타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처음 발성을 끌어냈을 때보다 지금 몸을 열게 하는 게 더 쉬운 일이었다는 건 조금 묘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활짝 피어나 어쩔 줄 모르고 안달 난 붉은 육체 안으로 스며들어가자 원하는 것을 잡아 삼킨 것처럼 마른 팔다리가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에게 귀속되어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고, 아낌에 모자람 없이 모든 것을 내어준다. 이츠키의 움직임은 카게히라의 반응과 맞물리고 카게히라의 숨소리는 이츠키의 정성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것은 비단 육체가 아니라 사랑이라.
몇 번인가 입을 맞췄다. 그 수보다 더 많이 이츠키가 카게히라의 안을 들쑤시고. 내내 포옹하다 욕망에 이기지 못한 때엔 시트를 짚고 허리만 격하게 몰아붙였지만 카게히라가 도망가는 법은 없었다. 새하얗게 잘 말라 뽀송한 이불이 질척하게 젖어갈 때까지, 하얗게 빛나던 햇살이 점점 기울어 주황빛이 될 때까지 두 사람은 사랑에 범벅이 되어 순수한 절경을 즐겼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사랑은 그렇게 밝고 찬란했다.
찬란한 빛, 그리고 점멸. 남자는 빔 프로젝터로 그 순간순간의 이미지를 넘기며 카게히라에게 보여주었다. 깜빡, 깜빡, 빛이 사라졌다 돌아올 적마다 다른 추억들이 겹겹이 올라간다. 카게히라는 반쯤 죽은 눈으로 누르스름하게 빛나는 벽을 응시하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벌써 며칠 째 질리지도 않고 찾아와 영문 모를 짓을 하고 있다. 그나마 기억하는 것 중 쓸모 있는 사실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으니 취조를 하고 있단 것이었다.
“이유를 모르겠네예. 이런 걸 보여주고.”
“네 죄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선 네 인간관계를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단 의미지. 카게히라, 그를 사랑했나? 그도 너를, 너와 같은 마음으로, 한없이 사랑했나?”
“모르지예.”
“…그렇다면 그를 증오했나?”
카게히라는 철제 책상의 가장자리만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대답을 거부했다. 잘근잘근 무는 아랫입술이 아릿했으나 그에 대한 감정을 곱씹는 것은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남자는 한참동안 대답을 기다리다 다시 프로젝터의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카게히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빛으로부터 도망쳤다.
“모든 일은 결말이 있어야만 해. 서로 떨어져 있던 것을 이어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면, 매듭을 지어야 한단 게야. 마무리를 두고 다른 것으로 도망가선 미완성품만 늘릴 뿐이다.”
“…내는 그를 사랑했심더. 나 자신보다도, 이츠키 슈를 사랑했단 말입니더.”
“그래… 네가 실토한 것과 증거품으로 보건데, 둘이 그렇게 애틋한 사이였단 사실은 틀림없군. 그렇다면 어째서 넌 다른 반지를 끼고 있지?”
남자가 작은 비닐 팩을 하나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금으로 반짝이며 한 가운데 그 무엇보다 영원할 다이아몬드가 아름답게 커팅 되어 꽂혀 있다. 카게히라의 시선이 하잘 것 없는 회색의 철에서 그 반짝이는 광석으로 옮겨간다. 마치 까마귀의 그것처럼 홀린 듯 그 광채를 보다 자신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네 번째 손가락을 어떤 것이 묶어두듯 두르고 있다.
장기 이식엔 많은 돈이 들어. 하지만 돈이 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딱 맞는 장기가 늦기 전 순서로 돌아오는 거야. 이 시스템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카게히라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얻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정도(正道)를 벗어난 일이라 망설임이 따랐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수단이 생길지 모르는 노릇이다. 그쯤엔 어떻게 정신을 붙들고 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항상 반쯤 미쳐서, 얼굴 가죽으로 웃고, 뼈로 움직이다, 밤에 자려 누우면 근육이나 관절 마디마디가 저릿했다. 제가 느낄 정도니 몸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는 그것보다 훨씬 거대한 것이었으리라.
좀 전에 본 이츠키와 자신의 애틋한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선택을 할 때에도 그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가장 최악을 택하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알고 계시겠지만 심장은 특히 이식 성공률이 낮은 편입니다. 육체에 맞느냐 아니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증자가 죽기 직전 병원에 있어야 하며, 사망 즉시 수술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경우의 수가 들어맞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렇다면 그 박자를 맞게 하면 되는 일이다.
“대답해라, 카게히라.”
“…….”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정보를 누설해선 안 돼. 그랬다간 둘 다 죽는다. 아니, 죽는 것보다 끔찍한 인생을 살게 될지 모른다. 자신은 상관없으나 제발 그는, 그만은.
하지만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어땠더라?
카게히라는 그 의문에 취하면 취할수록 자꾸만 마른침이 목 너머로 넘어가 갑갑함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벽 한편에는 여전히 강제로 확대되어 조금 흐릿한 이미지가 빛에 의지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양 손이 하나 뿐인 입을 틀어막았다.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덜덜 떨리는 것이 시야인지 제 몸뚱이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이미지 안의 이츠키는 총알이 머리를 관통한 채 비 오는 어느 건물의 옥상에 쓰러져 있다. 카게히라는 기어코 숨을 쉬기 곤란할 지경이 되어 힉, 힉, 하고 자꾸만 숨을 들이켰다.
남자는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다 주먹을 꽉 쥐고, 프로젝터를 껐다. 카게히라는 그제야 보이지 않는 결박에서 풀려난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를 숙인 채 구역질을 해댔다. 숨이 가팔라, 가팔라서… 어디서 주워들은 대로 양 손으로 입가를 둘러막고 숨을 진정시키려 한다. 그러다 희멀건 빛을 반사하는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뱀처럼 세공된 은테에 스피넬과 토파즈가 마치 눈알처럼 박혀있다.
“다시 묻겠다, 카게히라. 그 반지는 누구와 언약을 한 것이지? 내가 가져온 증거품인 이 반지는 이츠키 슈의 손가락에서 빼낸 반지란 게야. 네가 정말 거짓 없이 그와 사랑을 약속했다면, 그건 무엇이냔 말이다.”
“…이건, 이건 그러니까…….”
이츠키가 죽었다.
“카게히라, 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 보거라.”
명령과 같은 어조에 저도 모르게 후다닥, 주머니에 손을 우겨넣어 잡히는 것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비닐 팩에 든 것과는 치수가 조금 작으나, 분명 한 쌍으로 맞춘 듯 같은 디자인이다. 카게히라는 마른 목을 제 손으로 움켜잡으며 젖은 눈을 한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이츠키가 죽었다.
“이것 참…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질 떨어지는 사건이군.”
“…….”
“카게히라, 다시 묻겠다. 마지막까지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나? 조금도, 아주 조금도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나?”
욱, 욱, 헛구역질을 억지로 누르며 카게히라가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그날의 광경이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인 듯 선명하게 떠오르며 관자에 핏줄이 솟았다. 또렷하게 드러나는 원망의 앞에서도 남자는 그저 담담했다.
이츠키가 죽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자리에 있었다.
“……사랑하는 만큼 원망했지예.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한다이가!! 지금도, 내는 지금 이 순간도! 저 바보 같은 남자를 내는 원망한다!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할 수가…… ”
“그에게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진 않는 건가? 너는 그를 배신한 거나 다름없는 게 아니냐.”
“내가 바란 건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바란 건…….”
“그가 바란 것도, 단 하나 뿐이었단 게야.”
남자가 주머니에서 빈 탄피 하나를 꺼내 책상의 한 가운데에 두었다. 온전치 못하고 공허하게 일그러져 있는 그 탄피에 시선이 맞았다.
탕. 한 발의 총성이 머리에 와 꽂혔다.
3.
매일의 시작은 똑같다. 약이라도 투입하는 듯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도로 정신을 차리며 그 철제 책상 위다. 그 안에서 하루를 지새웠다기에 몸은 너무나 가뿐하고 결리는 곳 하나 없어 그저 어딘가에서 재우다 다시 취조를 하려 이곳에 데려오나,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그에 비해 정신은 맑지 않다. 약을 쓰는 게 분명하다. 어떤 날은 어제 어떤 대화를 했는지 겨우 떠올리다가 취조가 끝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츠키가 이성을 잃지 않은 건 자신의 담당이라는 그 남자가 지나치게 상냥했기 때문이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그러나 끄집어야 하는 일엔 잔인하도록 정확하게. 그러다 휴식. 그리고 또 휴식. 휴식에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바깥 공기를 쐰 지 너무 오래 됐다.”
“바깥은 비가 오대.”
“그 질척거리는 날씨마저 그리워질 지경이란 게야.”
“응후후… 우산도 없으면서 말이제?”
“젠장, 이 빌어먹을 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불유쾌하게 습한 감각마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단 게야!”
남자는 이츠키의 외침에도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이츠키는 허망하게 그 입가를 보다 숨을 고르며 자리에 제대로 앉아 고개를 돌렸다.
“나가고 싶다 마음을 먹으믄, 쉬이 나갈 수도 있는 거다.”
“나더러 자백을 하란 게야?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어제 대화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이가. 좋은 거래이.”
“그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징조지. 쯧. 이 빌어먹을 짓거리는 언제쯤에야 끝이 나는 건지….”
남자는 무얼 가져온 건지 아무 모양도 없는 민무늬 골판지 박스에서 무언가 꺼내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렸다. 시큰둥하게 성질을 내고 있던 이츠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네모난 유리관 안에 박제라도 된 것처럼 기억 속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작은 얼굴, 그리고 아름다운 벨벳 드레스.
이츠키는 남자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가도 고민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 안에서 마드무아젤을 꺼내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운 무게감이 마음을 꽈악 짓눌렀다.
“오늘은 잘 하는 걸 해보자. 복화술…이 특기라고 보고 받았데이. 자, 마드무아젤, 증언해주실 겁니꺼?”
“…….”
“너무 무겁게 생각 마이소. 그저 가벼운 질문을 몇 개 던질 뿐이니까는. 여의치 않다면 대답은 거절해도 되는 겁니더. 천천히, 쉬면서 가도 되는 일이니께.”
“…슈 군을 위해서라면.”
이츠키는 더더욱 견고하게 입을 닫은 채 마드무아젤을 조금 안아 올렸다. 눈앞의 남자는 이 유치한 인형놀이를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 유리 눈알에 친절한 말을 건네 왔다.
“언제 카게히라 미카를 마지막으로 만났지예?”
“…미카 쨩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그 날로부터 꽤 됐어. 슈 군이 입원을 해야 했거든. 내가 병원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아이들 장난감으로 쓰이는 건 질색이란다.”
“아하, 그럼 억수로 한참 됐네예. 보고받은 바로는, 이츠키 씨가 꽤 오래 입원했던 모양인데예?”
“그래. 인간이란 불완전함의 표본과 다를 바가 없지. 슈 군은 병에 걸려 입원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 애는 그 시간을 정말 싫어했어…. 지독한 약 냄새, 죽어가는 신음 소리, 맹목적이지만 헛된 믿음,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나을 방도가 전혀 없던 겁니꺼?”
“……있었지. 기계가 고장 나면 그 부품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처럼.”
이츠키는 문득 며칠이나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는 동안만 그랬다 하더라도, 원래는 깨어있는 내내도 간헐적인 발작을 겪었기에 병원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언제부터 증세가 완화된 거지. 그는 마드무아젤을 무릎에 내려두고 마른세수로 흩어질 것만 같은 정신을 붙들었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왜 카게히라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군.”
“……어제 우리 대화를 완전히 기억하는 건 아닌 거네.”
“뭐? 그럴 리가! 나는 너와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 내가, 그런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리가?! 만일 그렇다 한들, 너희들이 나를 밤마다 재우는 그 이상한 약물의 탓인 게 아니냐!”
“자, 자, 이츠키 씨, 진정하래이.”
“나는, 나는… 진정할 수 없다….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잘도 평정을 유지할 테지! 이 속없는 녀석 같으니! 뇌의 일부분을 빼두고 취조란 명목의 담소나 나누는 녀석은, 그런 녀석은…… ”
탁, 하고 물 컵이 놓인다. 이츠키는 그게 어디서 왔는지 의문을 갖지도 않은 채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방금 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 금방 모이지 않는 기억을 맞추려다 남자가 손을 뻗는 것에 얼른 마드무아젤을 품에 안았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그를 만지도록 할 순 없었다.
“…우리 어제… 어떤 일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그래. 그랬겠지. 내가 범인이라는 그 사건에 대해서 한참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백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거창하게 범인이라고 까진 안 했다이가. ……잘, 기억해봐라. 그게 무슨 사건이었는지.”
처음엔 죽은 듯 고요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말 이후 이츠키는 서서히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발작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에 바닥을 딛고 있는 다리는 너무나도 평온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지진이라도 난 듯 세상이 덜걱, 덜걱, 무너지듯 진동했다. 이츠키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마드무아젤을 쥐었다가, 다른 한 손으로 테이블의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점점 떨리는 정도가 도를 넘어서 온 몸을 부술 기세로 밀려와도, 눈앞의 남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얌전할 뿐이다.
이츠키는 그저 어제 일을 떠올리려 했을 뿐이다. 어제, 어제도 그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지. 그리고 시답잖은 잡소리를 떠드는 것을 두다가, 유메노사키란 단어를 꺼내기에 그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나눴다. 이젠 졸업해서 갈 일도 없지만 제법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나를 꺼내두면 다른 하나가 절로 튀어나와 꽤 오래 이야기를 풀었던 것 같다.
별로 이해할 것 같지도 않지만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서도 어쩌다 얘기를 흘렸다. 그는 빈말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 없다만 굉장하다며 웃어주었다. 흥미롭다는 듯 제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다, 결국 제가 졸업할 때 발키리는 어떻게 됐느냐 묻기에, 차기 제왕에게.
차기 제왕, 카게히라 미카.
이츠키는 숨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드무아젤이 바닥에 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츠키는 책상도, 그도 놓은 채 갑갑한 지 제 가슴을 두드리다 셔츠를 뜯을 것처럼 움켜잡았다. 답답하다. 무언가 중요한 게 있었는데, 그걸 떠올리면 시원해질 것 같은데, 그만큼 괴로울 것 같아서 스스로 막아서는.
얇은 흰 천을 뚫을 것처럼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손이 남자에 의해 텁, 잡힌다.
“…바, 발작이…… 의사를, ”
“진정, 진정해라. 이건…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라. 그냥 껍데기제. 우리를 가두고 있는 그냥 껍데기. 이런 것에 집착했다간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다.”
남자는 자신의 손을 잡아 제 뺨으로 가져갔다. 이츠키는 하얗고 부드러운 뺨에 땀으로 젖은 손을 강제로 올려두고 그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아니, 그 말은 그가 할 정도로 저차원적인 말이 아닐 텐데. 방금까지 무척이나 매끄럽다고 느껴졌던 남자의 피부가 그 사이 수척하게 말랐다.
“……카게히라가 죽었단 얘기를 했었군. 미카가, 나의 미카가 죽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어.”
“…….”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로.”
첫날, 그가 조부의 총을 꺼내 보내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니, 그게 첫날이었나? 사실 또 이렇게 모두 잊고 첫날인 것처럼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츠키는 불안정하게 자신을 압박해오는 진실 속에 다시 허우적거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남자도 제 자리로 돌아가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같은 디자인의 반지 두개를 꺼내 이츠키에게로 들이 밀었다.
금테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명실상부한 결혼반지다.
“…….”
“그를 사랑했제?”
“…….”
그리고 다른 손으론, 짝 없는 외로운 뱀 하나를 내민다. 지독하게 화려하구나, 그 안에 든 감정은 덧없는 주제에. 이츠키가 넋을 잃은 채 세 개의 반지를 한 눈에 담았다.
“그리고 배신당했고.”
“……왜.”
“왜냐고 물어도 내는 모른다이가. 내는 그저 이츠키 씨의 담당일 뿐이제.”
“…….”
카게히라가 저 짝 없는 반지를 끼고 왔던 날을 기억한다. 그 전날까진 분명히 제가 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그는 화려한 맛이 없어 저렇게 어지럽게 세공된 것은 어울리지 않는데. 수수한 것 같지만 세상 어느 것보다 값비싼 것이야말로 응당 그에게 주어져야 하는 몫인데. 그리고 그건 반지가 아니라 제 얘기다. 한낱 인간임에도, 그에게 있어 가장 값비싼 존재가 되고 싶었던.
정리를 해보자면, 그렇다. 자신과 카게히라, 서로 사랑했지만 그에겐 새로운 연인이 생겼고, 오늘 내일 하는 상태의 자신이 그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입원한 병원 옥상에서 카게히라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나를 의심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군.”
“…항상 이렇게 이성적인 척 하면서 가장 중한 요점을 모른데이. 그들은 그런 의심을 하려는 게 아닌 거다.”
“……그 날, 그 날이 언제지? 도통 왜… 내 기억은 이렇게 뒤섞여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게야? 미카가… 죽었다. 내 조부의 총에 미카가 죽었다! 하지만 나는 왜 자꾸 잊고 말지? 내가 죽였다면, 아니, 내가 죽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
이츠키는 머리를 관통하는 또 다른 단어에 숨을 멈췄다.
“그들은 누구지?”
“그들. 그러니까… 그들은, 죄인을… 심문하는 거다. 내는 이츠키 씨 담당이고.”
“…….”
“나가려면 방법을 간단하데이. 스스로를 가둔 원망을 깨부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한 뒤 용서를 비는 거다. 그럼 우리- 아니면 저들이 당신을 보내주는 거라. 다음으로.”
이츠키는 철문을 보았다. 지금 뛰쳐나간다 해도 남자는 자신을 붙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게히라가 죽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확실한 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영혼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지 못하면 금방 흩어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가… 모습을 갖고 대면하고 있는 거래이.”
그 전에도 이 말을 들은 적이 있었나.
“…자꾸 잊어도 괜찮다. 처음부터, 쓰레기장 얘기부터 다시 하면 되니까. 이츠키 씨는 원래부터 껍데기 안에 여린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이가. 자꾸만 흩어져도 이상할 게 없데이. 무리 하지 말고… 천천히…….”
그 애와 함께한 날을 후회한 적은 없다. 우연히 내려진 손길을 잊지 못하고 귀찮도록 들러붙는 것을 언짢아 한 적은 있으나, 그건 그를 사랑하게 된 뒤로 맹세컨대 단 한 순간도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카게히라, 나의 이 순간들을 너는 배신하고 말았지.
“……내가, 이 이츠키 슈가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날들을, 그 조악품이 다 뒤집어버렸단 게야. 마치 오셀로처럼… 말 하나 만으로 모든 판을 검게 물들였지.”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도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 거가?”
“이유가 어떻던, 용납되지 않는단 게야. 감히… 영원히 곁에 있으란 나의 명령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판단에 나선 것은…… 용서할 수 없어.”
“그래서 그의 앞에서, 그가 가장 열망했던 것을 빼앗았고?”
“그래, 그랬지. 하지만 누가 아냐는 게야… 그게 그 애에게, 조금도 상처가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걸. 정말 내게서 마음을 떠나보냈다면, 나 같은 게 죽든 말든 제까짓 게 무슨 상관이지?”
이츠키는 손을 들어 제 관좌놀이 옆에 총을 드는 시늉을 했다. 비가 온다고, 마치 그 날처럼. 철컥, 탕. 총을 쏘는 것은 쉬웠다. 사슴을 사냥하는 것보다도 더. 차라리 그 날 사슴이 아니라 제 머리통을 날렸더라면 이런 고통을 안지 않아도 됐을까. 삐거덕,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고 팔이 툭 아래로 떨어진다. 눈앞의 남자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젖은 콘크리트 바닥 위로 넘어지는 제 모습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4.
카게히라는 회색 벽에, 전등 하나 있는 취조실에서 눈을 떴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다. 정신을 조금이라도 놓으면 전의 기억은 흐려져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말테다. 하지만 카게히라는 허벅다리를 꼬집어가며 모든 것을 뚜렷하게 그려냈다.
그래야 했다.
“카게히라.”
“기다리고 있었데이. 내 말할 게 생겼다이가. …언제였제? 내 언제인가, 푸른 들판 사진을 보고 있었데이. 슈가 내 옆에서, 그게 어느 나라라고 했는데… 응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뉴질랜드?”
“여전히 바보 같군. 조사한 바로는 오스트리아다.”
“응후후… 그게 중요한 거가? 중요한 건, 내가… 그 풍경을 기억해냈다는 거 아이가? 아, 내가 말하고 싶은 거는… 그러니까, 허튼 짓을 하느니 그와 거길 갔었어야 했단 거다. 맑은 공기랑… 인공 심장이 아무리 안 맞아도 얼마간은 견딘다 했는데.”
“…카게히라.”
남자의 낯빛이 어두워 보여 카게히라는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다가가 얼굴을 디밀었다. 그동안 정이라도 들었을까. 처음 이 철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한동안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뭘 말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는 십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취조라는 것을 시작하다 매서울 만큼 몰아치는 그의 언행에 상처입고 울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만큼 빨리 모든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그의 배려일지 모른다. 모든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이츠키의 죽음, 그 이유로 몰린 자신, 그리고 모든 진실을 깨닫기까지. 이게 느렸더라면 오히려 자신은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을지 모르는 일이다. 워낙 둔해서 무너지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니까.
그렇게 이어진 취조는 마치 이츠키와의 연습을 떠올리게끔 했다.
“너는 다음 단계로 갈 준비가 된 것 같구나.”
“다 당신 덕이래이. 이름도 안 알려줬지만.”
“…확실한 게냐.”
“하모. 이렇게 확신이 든 건 살았을 때도 드물데이.”
“카게히라, 내 생각에 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지 않는 게야? 네가 완전히… 네가 지은 죄를 깨달았다는 것에 말이다.”
“…….”
카게히라는 조금 생각하는 듯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전등을 올려다보다, 내쉬며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까지 오려고 괴로웠던 만큼 모든 것을 뚜렷해졌다. 카게히라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시인하고 무릎 꿇었던 그 날을 기억한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었지만 피가 나지 않았고, 눈이 터져라 울었지만 눈이 터지진 않았다. 비록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가 영원히 바라 마지않은 유일한 것인 자신이 그를 떠나선 안 되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홀로 외롭게 분투하던 그를. 이츠키 슈를 버린 것을 반성해, 내 사랑을 죽게 만든 것은 나의 죄이고, 영원히 속죄해도 갚지 못할 상처를 그에게 주었다고.
몇날며칠을 울부짖으며 바닥을 때리고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어떤 날은 그가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날에도 카게히라는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자백이라도 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를 아프게 한 것을 너무나도 후회한다고. 특유의 눈치로 불안함에 떨며 멋대로 아무거나 결정하지 말라고 하던 그는 얼마나 애처로웠나. 그와의 약속을 어기고 다른 이와 가약을 맺은 것은 지옥까지 지고 가야할 죄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엔 자신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지 않은가? 그런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다시 자신을 불렀다.
“너는 누구보다 그를 알았어. 그리고 그가 약해졌다는 사실만큼이나, 주저앉았을 때 무엇이 필요한지도.”
“……맞다.”
“그가 가장 바랐던 건, 죽어가면서도 간절하게 원하던 것은 무엇이지?”
“…내 사랑. 나의 존재.”
“하지만 네가 그에게 두고 간 건 무엇이지?”
“나의 부재, 배신.”
“네가 그를 떠난 게 아무리 그를 위한 것이라 포장해도,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난 것이다. 네 결정이 그를 위한 게 아니라, 네 욕심을 위해서였다고… 이제 시인할 수 있는 게냐.”
“…슈는 한 사람으로써 내가 변치 않고 사랑해주길 바랐는데, 내는 그의 마음이나 감정보다 그가 살아서 내내 예술을 해주길 바랐던 내 욕심이 더 컸던 거라. 내가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악몽을 줬다.”
카게히라는 마치 누군가 총구라도 겨눈 것처럼 눈물을 머금으며 마지막 회개를 해냈다. 그를 떠나 그를 살리려 했던 것은, 오히려 독이 되어 그의 죽음을 더 앞당겨버리는 꼴이 되었다. 그 사실에 절망하고, 어째서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나 원망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재가 된다.
스스로의 감정은 모두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인데도. 타인의 슬픔이 될 일이라도 자신이 기뻐하면 기쁨이 될 줄 알고 저지르는 어리석은 속물.
“마지막 질문이자, 그저 가벼운 테스트다, 카게히라. 그때로 돌아가면, 네게 다시 선택이 쥐어진다면, 다른 선택을 하겠느냐.”
“하모. 물론입니더. 그가 스스로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내도 바라지 않어예.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용서를 빌고 싶습니더.”
남자는 카게히라의 서러운 울음에도 꿈쩍 않고 있다가, 마지막 말에 손을 감싸 쥐고 무겁게 입을 뗐다.
“너는 스스로 원망을 내려두고 이 오랜 시간 너를 고통 받게 한 그 이를 용서했다. 그 뿐 아니라 그에게 진 죄를 자백했지. 혹은, 너에게도. 이제 네가 짊어진 죗값을 치를 때가 왔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라. 여기, 나와 보냈던 시간보다 더 걸릴 수도, 어쩌면 영원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 나는 네가 다음으로 넘어가면 어떤 것도 장담해 줄 수 없단 게야. 이제 내가 없이 너 스스로 해나가야 하니까.”
“……그러면? 죗값이란 걸 다 치르면 그 다음도 있습니꺼?”
“…그렇게 해서, 네가… 모든 감정을 해소한 채 깨끗한 상태가 되면, 카게히라. 너는 정말 밖으로 나가는 게다. 죽음으로 만들어진 감옥에서 나가게 되는 거지. 말하자면 새로운 삶의 시작이란 게야.”
남자는 쓰게 웃으며 카게히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 담겨있어, 카게히라는 그저 철없이 웃었다.
“……새로운 삶에도 그가 있을까예?”
“그건 이제 네 손에 달려있다.”
“응후후…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네예. 유황불이나, 얼음 칼날 같은 게 있는 겁니꺼?”
“…하아, 반성을 하건 안 했건 넌 여전히 바보에 불과하군. 이게 그렇게 간단하고 유치한 과정은 아니란 게야. 내가 들어온 문을 열고 나가거라. 그럼, 취조실이 있을 게다. 마치 네가… 나와 처음 만났던 그곳과 아주 흡사한. 아니, 아주 같을 지도 모르겠군.”
카게히라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이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눈물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거기에 이츠키 슈가 있다.”
“…슈가? 이렇게 오랫동안 날 기다려왔다고?”
“아니. 여기가 실질적인 곳과 다르다는 것쯤은 아무리 이해가 느린 너라도 알겠지. 시간도 실체의 일부, 이 너머엔 너와 다른 시간을 걷고 있는 그가 있지. 죽은 바로 그 직후의, 널 원망하며 죽어간 이츠키 슈가.”
“그럼… 그를 만나면… 뭘 해야 하는 거지예? 용서를 비는 거가?”
“아니. 너는 내가 네게 했듯이, 그가 죄에 대해 자백하게 하고 스스로 원망을 부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지금 네가 해야 하는 일을, 그가 하도록 해야 해.”
“하지만, 하지만 이건… 전부 내 잘못이 아닌 거가? 내를 향한 원망을 사라지게 해야 한단 것쯤은 알겠데이. 하지만, 그도 자백을… 해야 한다면, 대체 그게 뭐란 말임꺼.”
“그건…… 여전히 네 안에 남아있는 잔존 덩어리들이 알려줄 게다. 만약 네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어 그를 이끄는 것 또한 네가 해야 할 일이란 게야.”
“응아아… 그거, 어렵겠네예. 내는 당신 없인 내 죄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 사람에게서 그런 걸 알아낼 수 있을지……. 게다가 그 사람은 고집불통이다 아입니꺼. 원망은 사그라지게 해도… …용서는, 그것도 내 앞에서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심더.”
“걱정할 것 없다. 그는 네가 카게히라란 걸 모를 테니까. 잊진 않았겠지? 여긴 죽음이 만들어낸 감옥이다. 물리적인 것은 구실만 흉내 낼뿐, 절대적이지 않아. 이건 전부 껍데기일 뿐이다. 그는 이런 것에나 집착하는 천하의 어리석은 우인이니 네가 너인 걸 밝히지 않는 이상 그는 너인 걸 끝끝내 알 수 없을 게다. 그리고 이건, 정말 중요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카게히라.”
남자는 문 앞에 선 카게히라의 뒤에서 무거운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들어 두는 것 같음에도 카게히라는 이 문 뒤에 이츠키가 있단 소리에 가슴이 뛰었다. 비록 자신을 원망하는 죽음 직후의 이츠키라 하더라도 그게 이츠키라면.
“그가… 만약에 네가 카게히라란 걸 알게 되면, 너는 모든 기억을 잃고 다시 이 방으로 돌아와야 해. 그래서… 또 나 같은 존재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지. 알겠느냐? 이건 정말로 중요하니 잊지 말거라.”
“…….”
문고리를 잡으려던 카게히라가 멈칫, 하고 망설임을 표했다. 그는 머리가 좋은 편이고, 자신은 그렇게 치밀한 편이 아닌 데 해낼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 했지만 남자는 그가 돌아설 수 없게 바짝 다가서서 손목을 잡아 문고리에 도로 돌려두었을 뿐이다.
“…카게히라. 반드시 해내거라. 그를 증오의 연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다.”
갑자기 드는 의문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는 문을 여는 것을 재촉했고, 카게히라는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엔 초췌한 안색의 이츠키가 철제 책상에서 시선을 떼고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카게히라는 허전한 느낌에 앞의 반가움보다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없다.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가두고 있던 취조실도 변했다. 그곳은 그날, 자살한 두 사람의 시체가 비에 젖어 서로를 향한 채 누워있는 잔혹한 사건 현장이 되어 가슴 한 구석을 후벼 팠다.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선택지에서 카게히라는 걸음을 옮겼다. 이츠키가 문 너머를 더 보게 될까 얼른 문도 내닫았다.
“…이츠키 씨, 처음 뵙겠심더.”
원망 어린 눈동자가 한껏 경계하고 저를 뚫어져라 본다. 카게히라는 솟구치는 눈물을 억누르며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5.
이츠키는 손을 들어 제 관좌놀이 옆에 총을 드는 시늉을 했다. 비가 온다고, 마치 그 날처럼. 철컥, 탕. 총을 쏘는 것은 쉬웠다. 사슴을 사냥하는 것보다도 더. 차라리 그 날 사슴이 아니라 제 머리통을 날렸더라면 이런 고통을 안지 않아도 됐을까. 삐거덕,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고 팔이 툭 아래로 떨어진다. 눈앞의 남자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이 모를 리가 없다! 당신만큼이나 카게히라 미카를 아는 사람도 없다이가!"
“…드물게도 나에게 화를 내고 있구나.”
“내는 화를 내는 게 아이라…!!”
“그 점이 마음에 든다. 너는 나를 괴롭게 하고 있어. 어째서인지 죽어서도, 심지어는 이 지옥 같은 곳에 갇혀서, 너 같은 멍청하고 진실이란 것에 가까워지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 속물에게 난 고문을 당하고 있단 게야! 그러니 너도 그만큼은 괴로워해야 공평한 것 아니냐.”
일어선 남자의 얼굴은 전등의 갓보다 위에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우는 것은 고사하고 떠는 것조차 참아내려 주먹을 말아 쥔 그는, 한참동안 말없이 거기 서있다 벽 쪽으로 제 몸을 붙였다. 상대를 압박하려 들 때처럼 거만하게 등을 댄 게 아니라, 한쪽 팔을 그 회반죽의 차갑고 단단한 벽에 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얼핏 빛이 드는 반쪽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표정 없이 굳어있었으나, 그것은 이츠키가 알 바 아니었다.
남자는 마치 바닥에 깊은 구멍이라도 난 듯 그 아래를 뚫어져라 응시하다, 그것과 별 다를 것 없는 풍경의 천장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이츠키는 마치 그를 고통 받게 하는 것이 비단 저의 존재 뿐은 아닐 거란 확신이 들고 만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고 난 후엔 자신을 덮쳐오는 패배감에 몸서리가 쳐져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국 남자에게 주려했던 모멸감은 그대로 자신에게 되돌아와 알량한 자존심을 치부처럼 건드렸다.
결국 흔들린 건 자신이다. 흔들릴 것 같아 상대를 먼저 공격하려 드는 나약한 자기방어. 평소라면 돌아서서 갈 곳이라도 있으나 이곳은 사방, 아니 육방이 막힌 회색의 취조실이다. 메아리처럼 모든 말은 돌고 돌아 그 말을 뱉은 자의 목구멍을 날카롭게 쑤셔댔다.
“……내는, 고통을 주려고 하는 게 아이라…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거다. 처음엔 어려울 것 같아도, 한 번 해내면 그리 어렵지는 않다이가. 당신 말대로 내는 멍청하고, 진실과는 거리가 먼 모질이다. 하지만 그런 내도 해냈데이. 내도 배운 거라.”
“흥. 죄인에게 모욕 받은 자신이 그보단 잘났다는 말을 돌려 하는군.”
“그게 아이라…… 당신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거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게 영원의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내는 감당할 거다.”
“왜지?”
“……내가 당신 담당아이가. 어딜 간단 말이고.”
영원의 시간. 영원히 곁에 있겠다고 한 이도 돌아서 자신을 죽음으로 밀어 넣었는데, 지옥의 문지기가 다시 그 말을 꺼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츠키는 철제 책상에 상체를 엎어트리고 팔을 내둘러 책상 위의 반지를 모두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다이아몬드. 하지만 세상이 멸망하는 날엔 아무리 제까짓 게 단단해도 돌조각에 불과하다. 하물며 부수려고 마음먹으면 뭔들 부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그보다 사람의 마음은 더 여리고 덧없다. 상황이 변하고, 감정이 변하고, 약속은 번복된다. 그럼에도 자신이 변함없이 죽음으로 향해야 했던 건.
“…너, 예전엔 소매가 헤지고 그러지 않았나?”
“무슨 소리고.”
“그렇게 붙어서 이리저리 움직이면, 소매가 헤지지 않으냔 말이다.”
“이런 거, 이런 것들. 전부 실재하지 않는 것쯤은 알 거 아이가.”
사실은 모든 것이 변해도 카게히라만큼은 변하지 않으리란 것에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많은 고난을 함께 했는가, 얼마나 많은 모진 말에도 그만은 떠나지 않고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었는가.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의 속을 깊이 헤아려 주는, 사랑하는 카게히라.
그런 카게히라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그게 어떤 사사로운 것이라도 이유의 일부에 자신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자신이 이유가 되어 자신을 떠나가야 한다면 그런 사랑이 존재 의미가 무엇일까. 그가 자신을 등지고 갈 곳은 지옥보다 더한 곳일 텐데.
이츠키는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섰다. 이제 전등의 빛에 가려져 서로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다.
“나는 마침내 사느냐, 죽느냐, 그 고민을 넘어선 새로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군. 자, 나는 죽음을 건너 낭떠러지에 다다랐단 게야. 이 빌어먹을 공연이 연출된 것도 알고 있지. 대본도 정해져있지 않나?”
“…….”
“그렇다면 합을 맞춰봐야겠군. 으레 나를 이런 구렁텅이에 빠트릴 땐 텐쇼인이 비웃고 있었지. 지금은 너의 그 ‘그들’이라는 것들이 나를 우롱하고 있으렷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할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복수, 하려는 거가?”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지금은 일단 무대에 올라야해. 나는 이츠키 슈, 카게히라를 불러오면 좋겠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겠지. …있나?”
“……그럴 순 없제.”
“그럼 네가 그 역할을 맡아라.”
이츠키는 철제 책상과 의자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잠시 숨을 골랐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이 솟구칠 것처럼 울대를 짓이겼으나 기왕 판을 벌여준다니 잠시 어울릴 수밖에. 숨으로 마음을 누른 채 몸을 휙 돌렸다.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주워 제 손에 끼우고 있었다. 그리고 카게히라의 반지는 주머니에, 남은 반지는 자신에게 내밀어 소품의 마무리를 돕는다.
관객! 이츠키가 얼른 마드무아젤을 의자에 앉혀두고 과장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준비가 다 되자 이츠키와 남자는 서로의 자리에 서서 흰 조명을 사이에 둔 채 미미한 빛에 서로를 견주어 보았다.
“카게히라, 너는 나를 지옥까지 쫓아오겠다고 했다.”
“…….”
“하지만 증오스러운 넌 그럴 필요 없단 게야.”
탕. 하지만 여기서 총이 나타날 일은 없다. 어차피 죽음이 배제된 그 뒤를 잇는 것뿐이니까. 한참 말이 없는 그를 기다리다 이츠키가 한 팔을 내밀 듯 벌렸다. 나름의 재촉이었다.
“……그래도 내는 갈 거다. 쫓아갈 거다.”
“넌 나를 떠났어. 죽음이 나를 바짝 쫓아오는 때에! 마치 속물들이 그러하듯 빛나는 내 모습만을 좇다 지기 시작하니 가볍게 발걸음을 뗐지.”
“……그런 나를, 그래도 사랑했다이가.”
“그래! 우습게도 매일 같이 내 숨을 죄여오는 짙고 검은 구름보다 두려웠던 건, 네가 나를 떠나는 거였어! 난 자존심마저 버리고 애원했지만 넌 내 생을 저버리면서까지 나를 떠났다! 그러고도 나를 부득불 쫓아오겠다고 하는 게냐?”
“그러니까 가겠다카는 거 아이가.”
“뭐?”
“살아서…, 살아서는 떠나야했으니까, 죽어서는 배신한 만큼 속죄하고 싶은 거다.”
남자가 금방 끼웠던 반지를 빼내 바닥에 떨어트렸다. 깡, 하고 돌덩이에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지만 그래봤자 하찮은 무게다.
“그토록 나를 생각하면서, 내가 왜 죽었는지, 그건 궁금하지 않은가 보군.”
“…내가 미워서 아이가. 당신을 떠난 내가 미워서, 그래서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던 걸 눈앞에서 뺏은 거제.”
“아니. 그건 그저 네게 주고 싶었던 절망이지. 알지 않나? 나는 내가 괴로운 만큼, 혹은 그보다 더 상대에게 돌려주고 싶어 하지. 그러나 나는 내 연인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어. 내가 죽은 건, 카게히라, 내가… 내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이츠키는 가까이 다가와 남자의 흰 손을 마주잡았다. 차라리 이렇게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은 채 떠났더라면, 스스로 나락에 빠지는 것으로 만족했을 텐데. 텅 비어있는 네 번째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이츠키가 내내 붙들고 있던 눈썹 사이에서 힘을 뺐다.
“네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난, 그런 너를 생지옥에 밀어 넣고 살 수 없을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너를 사랑했다.”
“…….”
“난 바보천치가 아니야. 네가 어떤 곳과 거래 조건을 가지고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돈 조금만 힘써도 알 수 있어. 카게히라, 내가 그걸 납득할 거라고 생각한 게냐? 사랑하는 널, 그런 진흙탕에 처박은 대가로 연장된 수명을… 조금이라도 내가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게야?”
카게히라가 새로 만난다던 그 연인. 야쿠자랑 연관된 건 확실하고, 연예계 쪽 기자들을 들쑤셔보니 빚이 있는 유명 연예인들 중 몇몇이 그와 열애가 났던 적이 있었다. 그가 속한 곳은 마음에 드는 사람은 어떻게든 끌어들이려 도박이나 마약에 빠트리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섭해선 장기 말처럼 이용해먹다 마지막엔 아무도 모르게 마무리 짓는 질 나쁘고 확실한 집단. 겉으론 결혼해서 잘 산다며, 이제 은퇴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자 한다는 기사 뒤로 이어지지 않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들.
선택지가 없는 것은 카게히라 만큼이나 자신도 그랬다. 다만 이츠키는 한 편에 의심이란 희망을 품기로 했다. 정말, 정말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난 거라면 이 모든 건 의혹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고. 우연히 그런 질 나쁜 곳과 연관된, 어떤 끄나풀과 알량한 연정에 빠졌을 지도. 그래서 자신이 죽고 나면 그가 그런 어둠이 아닌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지도 모른다는, 배신에 대한 희망.
그러나 카게히라만큼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결국 그것이 방아쇠를 당기게끔 했다. 배신이란 희망인가, 사랑이란 절망인가. 하지만 그게 무엇이라도 카게히라가 살길 바랐던 것이다.
“……슈.”
“네가 원망스럽다. 네가 지독하게 미워. 나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느냐?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이 미칠 듯이 두려워서, 한순간은 너를 팔아 일단 고비를 넘기고 그 다음을 생각하자고, 정말 미치기도 했어!”
“그러지 그랬나! 내가 원한 건 그거였는데, 그것뿐인데…….”
“네 이런 이기적인 멍청함이 나는 증오스럽단 게야…. 어찌하여 너는, 나를 따라 지옥에 올 생각은 하면서, 내가 널 따라 지옥에 갈 거란 생각은 못 하는 거지?”
이츠키는 남자를 품에 안았다. 애써 티내려 하지 않았지만 껍데기뿐이라던 육체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어, 마음이 쓰렸다.
“결국 넌 나를 따라 이 지옥에 왔구나, 미카.”
“…우리… 영원히 여기에 갇힐 거다.”
“그래. 네가 날 배신한 만큼.”
인간의 손이 맞닿고, 인간의 입술이 부딪힌다. 낯선 살가죽 아래에 있을 사랑하는 영혼이 그립고 애타서, 그 안을 마주하고 싶어서. 서로가 안달 났지만 이젠 자신이 없다. 모든 것은 불완전 연소되어 감정이란 찌꺼기만을 남겼다.
겨우 빛을 내고 있던 등이 깜빡거리다 점등된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갈구하다, 육면체의 방은 영원히 소멸에 이른다. 짧은 사랑의 재회는 이별의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E.
문을 닫고 나오면 비가 오는 옥상 위다. 아래와 연결된 문을 열고 나온 것 같으나 등 뒤의 문엔 카게히라가 울고 있는 취조실이 있다. 이츠키는 안아 달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얼른 문을 닫고 매일같이 앉아 쉬는 곳에 몸을 내린다. 조용히 일정한 간격으로 수를 세고 있노라면, 조용히 문이 열리며 자신이 조부의 총을 가지고 올라와 카게히라에게 전화를 건다.
카게히라, 네가 결국 날 죽음에 몰아넣는구나.
“바보 같군. 혼자 죽으려거든 한 발만 장전했어야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자조적인 말을 하면서도 사실 알고 있다. 만약 첫 방아쇠에 총알이 없다면, 죽음을 무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예정된 미래는 모른 채 죽음 앞에서 낑낑거리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그게 끝이라면 좋겠지. 하지만 넌 죽음이 만든 감옥에 갇혀서 카게히라와 영원히 고통 받을 거야.
이츠키는 이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어떤 남자에게 들었다. 그는 좀 어수룩하여 남이 속이려들면 금방 넘어가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할 테냐고. 물론 그래야지. 저런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짓을 다시 반복하느니 다른 수를 생각해야지.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다. 그렇기에 이츠키는 다른 선택을 하겠노라 맹세했다. 미래에서 어떤 과거의 일을 약속한들 소용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반쯤 속이고 ‘다음 단계’라는 것에 돌입한 거나 마찬가지다. 물론 카게히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느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무엇보다 이 단계에 다다르자 더욱 측은함이 쌓이고 말았다.
“…미카, 오지 말거라.”
문이 벌컥 열리며 카게히라가 뛰어 들어온다. 아니, 나온 걸까. 처음 저 광경을 보고 얼마나 가슴을 짓누르며 울었는지, 정말 자신들을 감시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이젠 하나의 신파극을 보는 것처럼 조금은 지루하고 그 차에 흥미를 잃었다.
카게히라를 향해 겨누고 있던 총구를 스스로에게 갖다 대는 꼴을 보며, 이츠키가 허탈하게 웃었다. 탕, 하고 자신이 쓰러진다.
“하지 말거라. 그러지 말거라. 나를 배신하란 게야. ……제발.”
하지만 카게히라는 세상이 떠나가라 괴성을 지르며 오열하다 뭔가가 끊긴 듯 잠시 멈추더니, 죽어버린 자신의 손에서 총을 가져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입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애석하게도 그가 죽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린다. 그래봐야 몇 초.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닳지 않는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자신을 찔러오는 형벌이 된다.
숨을 억누르다 그의 숨이 끊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이제 소용없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될 때쯤 몸을, 아니 정신을 추스르고 두 구의 시체에 다가가 증거물을 집는다. 총, 탄피, 반지.
이제 또 시간이다. 이츠키는 정말 혼자 죽을까 외로워 옥상 구석에 둔 마드무아젤을 향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다. 살아있는 세상의 마드무아젤은 쓰레기처럼 버려졌겠지…….
결국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 결말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
이츠키는 직감하고 있다. 그 남자가 말한 구원, 이 감옥에서의 해방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란 걸. 왜냐면 이 문을 지나오고 나서야 그 남자가 카게히라란 것을 깨달았으니까.
손잡이를 잡으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다. 그냥 자신이 이츠키라고 밝힐까, 아니면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그를 구원해볼까, 아니면… 반만 구원해서 그가 다시 돌아오게끔 할까. 그래서 그의 원망을, 그의 얕고 순수해서 멍청하게까지 느껴지는 사랑을 곱씹기나 해볼까.
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카게히라가 잠에서 깨어난 듯 철제 책상에 머리를 대고 있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본다. 그럴 때면 이츠키는 그를 안고 싶어서, 입을 맞추고 싶어 온 영혼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살아서도 그랬듯, 그는 일말의 희망을 품어보기로 한다.
이번엔 배신의 희망이 아닌, 믿음의 희망을.
슈미카 합작! 열어주신 주최님, 참가하신 분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 세계관을 차용한 원작 대본이 정말정말 재밌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보셔요~ 슘카 대메이져~~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 / 카린 / 나방의 춤 (0) | 2019.11.22 |
---|---|
글 / 료밍 / 안고 안으며 (0) | 2019.11.17 |
글 / 에리카 / 파르란 계절에 꿈은 시들고 (0) | 2019.11.17 |
글 / 에리카 / 재상연의 인형 공방 (0) | 2019.11.17 |
글 / TR / 무제 (0) | 2019.11.17 |